정부는 지난 십여년간 저출산 해결을 위해 수백조원을 쏟아부었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은 이미 증명되었다.
심리학적으로 스트레스에 반응하거나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폭행과 타살 등 밖으로 분출되는 공격(Fight) 반응이다. 둘째는 은둔과 자살 등 안으로 향하는 도피(Flight) 반응이다. 셋째는 임상적 무기력증을 보이는 얼어붙는(Freeze) 반응이다. 넷째는 고통을 마약으로 마비(Numb)시키는 대응이다. 마지막으로 저출산(Infertility)은 미래에 대한 극단적 절망감의 표출이다.
흥미로운 점은 국가마다 스트레스를 분출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은 인구 10만명당 타살(0.6명)과 강력범죄율이 매우 낮지만, 내향인 자살(28명)과 은둔(수천명)은 상당히 높다. 반면 브라질과 멕시코는 자살률은 낮지만, 외향인 타살과 강력범죄율이 매우 높다. 미국이나 영국은 자살과 타살률은 중간 수준이지만, 마약으로 현실을 잊으려는 마취 반응이 한국의 100배에 달한다.
비록 스트레스 분출 방향은 다르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에서는 각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의 총합이 10~15% 내외로 상당히 일률적이다. 그래서 최근 한국에서 마약 문제가 급증하니 자살률은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방식은 유독 극단적이다. 역사적으로 출산율 0.7~0.9는 우크라이나처럼 전쟁 중인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수치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수십년간 쉼 없이 싸워온 '전쟁터'다.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파이팅!"을 외친다. '투쟁정신'으로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에서 승리했지만 되레 정신건강을 해치는 셈이다.
싸우는 전쟁터에서는 관계가 끊어진다. 이별과 사별, 이주민과 이산가족 등 단절이 일상이 된다. 전쟁 같은 경쟁사회 속에서 우리는 핵가족을 넘어 '고독한 혼족'의 시대로 밀려났다. 우리는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각자도생하며, 미래라는 자식에게 이 고통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무의식적 결단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출산과 자살은 경제적 빈곤의 문제라기보다 '관계의 빈곤'에서 오는 질병이다. 단절된 개인들이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연대감이 회복될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을 선택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데이터 고속도로를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촘촘한 보행길'을 복원하는 일이다. 이제 국가 차원에서 '관계 건강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구체적인 연결 실천방법들이 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아리아스 대통령이 코스타리카에서 했듯이 우리도 학교에서 모든 학생에게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겠다.
조벽 고려대 석좌교수·HD행복연구소 공동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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