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지난 21일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첫 질문은 '환율'이었다. 기자회견이 열리기 직전 원·달러 환율은 개장과 동시에 1480원을 돌파했다. 그나마 "당국에 의하면 한두 달 지나면 1400원 전후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한다"는 이 대통령의 답변이 나온 직후 1460원 후반대까지 떨어졌다.
환율이 이날 기자회견의 첫 질문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해 9월 이후 고환율 기조가 이어지면서 달러 강세로 수입품 가격이 오르고 외채 상환 부담이 증가할 거라는 우려가 커졌다.
이러한 우려는 그저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전문가들은 지금의 상황을 1997년과 동일선상에서 볼 수 없다며 과도한 우려에 선을 그었다.
환율 내려도 다시 오르는 이유
정부가 지난해 10월 구두 개입을 시작으로 약 3개월간 10차례 이상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환율 상승세는 꺾이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말에는 정부가 강력한 환율 방어 의지를 드러내고, 국민연금이 환헤지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며 1420원대까지 급락했지만, 해외주식 투자가 다시 빠르게 늘고 엔화 약세 등 글로벌 불확실성까지 겹치며 보름 만에 개입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이 이례적으로 한국 원화 약세를 우려하는 메시지를 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센트 장관의 발언 직후 원·달러 환율은 1460원대로 10원 이상 하락했지만 장중 빠르게 낙폭을 축소했고, 다음날 1470원대를 바로 회복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원화 약세 기대 심리를 이기지 못하는 시장 개입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외 투자자들이 달러를 매수하는 수요가 환율 상승 압력을 더 강하게 만들면서, 정부가 내놓는 정책의 단기적 효과를 희석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원·달러 환율을 상승 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해 4월 '최근의 환율 변동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원·달러 환율의 상승은 미 달러화 요인과 국내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통화정책 기조 변화가 여타 국가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변화"시켰고 "과거와 달리 한국의 개인·기관 투자자들은 해외 주식·채권 등으로 자금 이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특히 국내 개인투자자의 미국 주식 투자 규모가 크게 늘어나며 원화를 팔고 달러를 매수하는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라며 이유를 설명한다.
서민 체감 경기는 갈수록 악화
고환율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서민들의 체감 경기는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환율 상승이 대출 이자, 해외 소비, 생활물가까지 연쇄적으로 끌어올리면서 가계 부담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출금리가 올랐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5회 연속 연 2.50%로 동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중은행의 대출금리는 빠르게 올랐다. 주택담보대출 금리 상단은 6% 중반까지 올라섰다.
장바구니 물가도 환율의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전월보다 0.4% 상승해 9월 이후 4개월 연속 오름세를 기록했다. 사과 가격은 19.8%, 감귤은 12.9% 급등했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품목의 가격 상승은 더욱 가팔랐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대비 원화 기준으로 커피 수입물가는 약 4배 뛰었다. 달러 기준으로 30% 오른 소고기는 환율을 반영하면 원화 기준으로 60% 올랐다. 국제 가격이 하락한 밀조차도 원화 기준 수입물가는 22% 올랐다. 환율 상승이 물가 상승 압력을 증폭시키고 있는 셈이다.
해외여행 수요도 위축됐다. 관광지식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7~9월 해외여행객 수는 709만3383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7만9928명 감소했다. 코로나19 이후 수십만 명씩 늘던 증가세가 처음으로 꺾인 것이다. 환율 상승으로 해외 체류비와 항공료, 숙박비 부담이 커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유학비 부담도 빠르게 불어났다. 미국 상위권 사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은 약 2만 달러 수준이다. 지난해 가을학기 등록금 납부 시점인 지난해 8월 20일 환율(달러당 1397.9원)을 적용하면 약 2795만원이었지만, 1월 22일 환율(1468.7원)을 기준으로 하면 약 2940만원으로 늘어난다. 환율 상승만으로 한 학기 등록금이 약 140만~150만원가량 더 늘어난 셈이다. 연간 기준으로는 부담이 300만원 가까이 확대된다.
이처럼 고환율이 생활 전반을 압박하자 불안 심리도 커졌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고환율이 계속되면 ‘제2의 IMF’가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퍼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환율 급등과 외화 부족을 경험한 국민적 트라우마가 다시 자극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IMF는 너무 간 얘기"
그렇다면 정말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의 상황이 재연될까.
한국은행은 외환위기설에 대해 공식적으로 일축했다. 윤경수 한국은행 국제국장은 19일 블로그에서 "외환·금융위기는 근본적으로는 대외지급능력이 약화되어 달러자금의 차입이 어려워질 때 발생하는 것"이라며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순대외채권국이자 충분한 외환보유고 및 대규모 대외순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전형적인 위기 상황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역시 "외환위기는 너무 간 얘기"라면서도 "위기시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이 부족할 수 있다는 점은 불안 요소"라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현재 외환보유고가 약 4200억 달러 수준인데, 이를 보수적으로 보면 4000억 달러가 최소 마지노선이다. 실제로 즉시 활용 가능한 자금은 약 200억 달러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안 교수는 환율이 일정 구간에서 등락하다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시장에 달러에 대한 수요는 계속 있어 1400원 중반에서 1500원 초반대가 당분간 등락을 거듭할 것"이라며 "1500원대는 뚫을 수 있어도 1600원대까지 오르긴 어렵다. 1500원 초반대에서 자동 조정 메커니즘이 작동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sms@fnnews.com 성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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