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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구원했지만 끝내 고독했던 천재.. 몰입의 100분, 연극 '튜링머신' [주말엔 공연 한 잔]

김희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1.24 10:00

수정 2026.01.24 10:00

앨런 튜링 역 배우 이승주(왼쪽)와 미카엘 로스 역 외 배우 문유강 /사진=크리에이티브 석영 제공
앨런 튜링 역 배우 이승주(왼쪽)와 미카엘 로스 역 외 배우 문유강 /사진=크리에이티브 석영 제공

[파이낸셜뉴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내거든요."

이 말은 종종 수학자 앨런 튜링이 남긴 명언으로 소개되지만, 사실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각본가 그레이엄 무어가 창작한 영화 속 대사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한 튜링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원래 뜻은 기계의 인공지능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튜링이 제안한 시험(튜링 테스트)를 뜻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튜링이 '에니그마'를 풀기 위해 만든 기계가 곧 '튜링머신'이다.

'튜링머신' 역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튜링이 개발한 '계산하는 기계' 즉, 오늘날 컴퓨터의 이론적 시초를 의미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2026년 1월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한 브누아 솔레스 원작의 연극 '튜링머신'이다.

암호 해독보다 난해했던 그의 고독, 앨런 튜링

연극 '튜링머신'을 보기 위해서는 이 극의 주인공 앨런 튜링(1912~1954)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튜링은 영국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독일군의 암호 기계 '에니그마'를 해독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전쟁 영웅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시초인 '튜링머신'의 개념을 고안하고, 인공지능(AI)의 기준이 되는 '튜링 테스트'를 창시한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업적만큼이나 비극적이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잘 다루고 있듯, '에니그마'를 해독해 1400만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한순간에 범죄자로 전락했다.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튜링은 결국 화학적 거세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2년 뒤, 41세의 젊은 나이에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베어 물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연극 '튜링머신'은 바로 이 지점, 위대한 업적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지독한 고독과 부당한 시대의 폭력에 조명을 비춘다.

영화가 '영웅의 고독'을 그렸다면, 연극은 '인간의 고독'을 그렸다

연극은 튜링이 집에 도둑이 들었다며 경찰을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수사관 미카엘 로스 형사는 튜링을 스파이로 의심하며 취조하지만, 튜링은 엉뚱하게도 자신의 '생각하는 기계'와 튜링 테스트에 대해 늘어놓는다. 튜링을 러시아의 스파이로 의심하던 로스 형사가 그를 진정으로 이해해 가는 과정 속에서, 관객들의 시선은 외롭고 엉뚱하며 처절할 만큼 솔직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튜링에게 고정된다.

앨런 튜링 역 배우 이상윤(왼쪽)과 아놀드 머레이 역 외 배우 최정우 /사진=크리에이티브 석영 제공
앨런 튜링 역 배우 이상윤(왼쪽)과 아놀드 머레이 역 외 배우 최정우 /사진=크리에이티브 석영 제공

영화가 '에니그마' 해독에 초점을 맞춰 전쟁 영웅 튜링의 명과 암, 그 이면의 고독을 그려냈다면 연극은 튜링의 정체성과 그로 인한 사회적 탄압, 그리고 끝내 사과를 베어 물기까지의 심리적 궤적을 묵묵히 따라간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관객은 '난해한 암호' 같았던 튜링이라는 인간을 함께 해독해 나가며 그가 느꼈을 고독에 깊이 공명하게 된다.

2023년 국내 초연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번 재연 역시 신유청 연출이 맡았다. 객석이 무대를 사방에서 감싸는 4면 무대 구조 역시 동일하다. 무대 사방에 객석이 있기 때문에 관객은 튜링의 등 뒤에서, 혹은 정면에서 그의 떨리는 손끝과 표정을 적나라하게 지켜볼 수 있다. 객석의 우리가 그의 삶과 고독의 목격자인 셈이다.

세 명의 튜링, 세 가지 색의 고독

무대 위에는 단 두 명의 배우만이 등장한다. 앨런 튜링 역에는 초연 당시 튜링의 상대역을 맡았던 이승주를 비롯해 이상윤과 이동휘가 캐스팅됐다. 섬세한 감정선으로 고독을 극대화하는 이승주, 차분하면서도 어리숙하고 감정적인 모습 속에 고독을 드리운 이상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튜링이라는 인물을 무대에 구현해낸다. 이동휘는 연습 과정에서 부상을 당해 내달 1일 처음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여기에 이휘종, 최정우, 문유강이 튜링을 취조하는 형사 미카엘 로스, 튜링의 애인 아놀드 머레이와 체스 챔피언이자 '에니그마'를 풀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한 동료 휴 알렉산더까지 1인 다역을 맡아 극을 탄탄히 뒷받침한다.
연극 '튜링머신'은 오는 3월 1일까지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한다.

"요즘 어떤 공연이 볼 만하지?" 공연 덕후 기자가 매주 주말, 공연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쏟아지는 작품의 홍수 속에서 어떤 작품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관객들을 위해, 기자가 직접 보고 엄선한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당신의 주말을 채워줄 즐거운 문화생활 꿀팁, [주말엔 공연 한 잔]과 함께 하세요.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