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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로 한중 첫 합의각서 서명한 공로명 전 장관

연합뉴스

입력 2026.01.26 16:13

수정 2026.01.26 16:13

'대한민국' 대표로 한중 첫 합의각서 서명한 공로명 전 장관

1995년 고노 요헤이(오른쪽) 당시 일본 외상과 악수하는 고인 (출처=연합뉴스)
1995년 고노 요헤이(오른쪽) 당시 일본 외상과 악수하는 고인 (출처=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지난 25일 별세한 공로명(孔魯明) 전 외무부 장관이 '한국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전국민에게 알려진 계기는 1983년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이었다.

외무부 제1차관보였던 고인은 사건이 벌어진 뒤 중국과의 협상에 한국측 대표로 나섰다. 2015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휴일이라 일찍 귀가했던 나는 오후 4시쯤 무심코 태평로 (외무부)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지금 비상이 걸렸다'며 '청와대 회의가 있으니 빨리 올라가시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중국은 북한을 의식해 '정부간 교섭'을 꺼린 반면, 한국은 양국의 국호를 사용하자고 고집했다.

고인은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정부는) 민항기 사건을 계기로 '북방외교'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는 전략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정부의 이러한 의도는 사건 한 달여 뒤인 6월29일 이범석 당시 외무부장관이 국방대학원 특강에서 '우리 외교의 과제는 소련, 중공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북방정책에 있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확인된다"고 했다.

결국 "양국의 공식 명칭을 합의각서에 넣자"는 한국 주장을 중국이 받아들였고, 합의각서 서명자는 '대한민국 외무부 제1차관보 공로명'과 '중화인민공화국 중국민항총국 국장 선투'로 정해졌다. 한국전쟁 휴전 후 꼭 30년만에 처음으로 양국의 공식 국호를 사용한 첫 외교교섭이 성사된 순간이었고, 고인이 그 당사자였다. 이는 북방외교의 출발점이기도 했고, 9년 후인 1992년 한중수교의 주춧돌이 됐다.

고인은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사건 대응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무언가에 쫓기듯 발빠른 대응을 보여준 배경에는 당시 납치됐던 여객기에 중국의 최고 군사기밀을 쥐고 있는 미사일 전문가(쉬광젠)가 탑승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또 "사흘간 밤을 새워 가며 민항기 사건을 처리한 나는 정부로부터 '칭찬' 대신 '매'를 맞았다"며 "민항기 사건 당일, 공무원들의 비상연락망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탓에 감사원 조사를 받았고, 대통령 명의로 계고장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래도 이 사건은 전국민에게 고인의 얼굴과 이름을 각인시켰다. 월간조선 인터뷰에선 외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영주에 갔을 때 식당 주인이 '아니, 공 차관보 아니냐'며 밭에서 딴 과일을 선물로 주더라는 일화와 함께 "국민들은 외무부 장관 공로명보다 민항기 사건으로 텔레비전에 '율 브리너'(?)로 비친 나를 더 기억하는 것 같았다"고 썼다.

고인은 1958년 4월 외무부에 들어가 1996년 장관을 끝으로 떠날 때까지 38년간 외교 무대에 서 있었다. 외무부 태평로 청사가 지금의 서울파이낸스센터 자리에 있을 때였다. 그중 가장 많은 기간을 일본대사관 2등서기관, 아주국 심의관, 아주국장, 주일 대사 등 대일 외교에 바쳤다. 일본과 만난 것은 1964년 5월 외무부 동북아과에 배치되면서부터였다. 1964년 12월3일부터 1965년 6월22일까지 약 7개월간 한일회담의 마무리 작업인 제7차 한일회담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수교 이후 격동의 한일 관계를 막전막후에서 지켜봤다. 1993∼1994년 주일대사 시절에는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한 '고노 담화'와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의 '경주 발언'이 나왔고, 1994∼1996년 외무 장관일 때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1924∼2025) 총리의 '무라야마 담화'가 나왔다.

대소련 외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 초대 '영사처장' 직함으로 소련에 부임해 같은 해 한소 수교를 이끌었고, 1990∼1992년 초대 소련 대사를 지냈다.

그밖에도 1975년 베트남전쟁 종결 후 이대용 공사 등 한국 외교관 3명이 사이공 내 교도소에 수감된 뒤 외무부 아주국장으로 있던 1978년에는 북한, 베트남과 3자 회담에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한국 외교관 1명당 한국에 구금된 간첩 7명을 교환하자고 잠정 합의했다가 결국 1980년 한국 외교관 3명의 석방으로 이어졌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에는 외무부 정무차관보로서 안보 경협 차관 협상에 참여했다.

외교관 시절 남북핵통제공동위원장,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 등을 맡아 남북 핵 협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6년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동아시아재단 이사장, 세종재단 이사장, 한일포럼 회장 등을 지내며 민간 외교 활동에 힘썼다.

chung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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