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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칼럼] 마크 카니의 명연설로 본 우리의 생존전략

노동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1.26 19:31

수정 2026.01.26 19:31

규칙 무너진 '질서파열'이 현실
식탁 앉지 못하면 메뉴판 신세
최우방국 美·캐나다마저 갈등
"스스로를 지킬수 있어야 한다"
"중견국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두가지 생존전략에 선택기로
노동일 주필
노동일 주필
마크 J 카니. 2025년 3월부터 캐나다 총리(자유당)로 재직 중이다. 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영국중앙은행(영란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 시절 글로벌 금융위기에 비교적 잘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상 첫 외국인 영란은행 총재로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요동치는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했다고도 한다. 주요 경력에서 보듯 정치보다는 경제가 전문 분야이다.

하지만 현재 카니 총리가 마주한 가장 어려운 과제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미국, 정확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시절, 당시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트럼프를 만나러 마러라고를 방문했다. 트럼프는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건 어떤가" "캐나다 주지사"라며 공개적으로 트뤼도를 조롱했다. 트뤼도 사임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다. 카니 총리가 뒤를 이었지만 "캐나다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다"는 등 트럼프의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카니 총리의 취임일성은 캐나다가 어떤 형태로든 미국의 일부가 되지 않겠다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2026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카니 총리는 지난 20일(현지시간) 연단에 올랐다. 그는 지금의 현실이 "규칙 기반의 질서(rules-based order)가 사라지고, 강자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약자는 견뎌야만 하는 시대"라고 진단했다. 카니 총리는 "우리는 변화(transition)가 아닌 파열(rupture)의 한가운데에 있다"면서 "강대국 간 지정학이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잔혹한 현실"을 지적했다. "식탁에 앉지 못하면 메뉴판에 오르게 된다"는 말도 했다.

"규칙이 더 이상 당신을 보호하지 못할 때,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카니 총리의 첫 번째 처방이다. 중견국들이 의존해 온 다자기구들, 유엔, 세계무역기구(WTO) 등에 의한 집단적 문제 해결의 구조는 크게 약화되었다. 많은 국가들은 에너지, 식량, 핵심광물, 금융, 공급망 등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국가의 자율성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카니 총리의 문제의식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이다.

카니 총리는 또한 중견국들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옛 질서 대신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강조점이었다. 그는 중간 강대국 혹은 중견국들(middle powers; intermediate powers)이 뭉쳐서 전략적 자율성을 구축하고, 강대국에의 종속을 받아들이는 것 대신 파트너십을 다변화하라고 촉구했다. 국내 회복력을 강화하고, 중견국들의 연합을 형성하고, 그를 위한 새로운 기관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니 총리의 연설은 품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명연설이었다. 그린란드 등을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무리수에 대한 비판도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설득력 있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세계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포착해내고, 그 혼돈의 한복판에서도 미래의 지향점을 잃지 않는 혜안을 보여준 연설이었다.

국가의 전략적 자율성 강화, 중견국 간의 연대. 우리에게 이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없다. 바로 엊그제 공개된 미국 국방부(전쟁부)의 2026 국방전략(NDS)에서 미국은 "한국은 북한 억제의 '주된 책임'을 질 능력이 충분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반도 문제는 한국이 알아서 하란 얘기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우리만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다. 유럽과 중동 등 다른 지역에서 동맹국과 파트너들이 자국 방어의 1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모든 역량을 서반구에 집중하면서 중국 억제에 나서겠다는 기존 전략을 더욱 명확히 서술한 것이다. 주한미군도 대중국 전략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자주국방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우리의 생존전략인 이유이다.

중견국(준강대국) 연대 또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외교전략이다. 일본과 먼저 연대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국·일본, 호주·캐나다 등의 연합체 구성을 주도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역량은 이를 주도하기에 충분하다. 다른 누군가가 나서기를 기다리기보다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인권존중, 시장경제 등을 기본가치로 하는 국가들의 협의체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가치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고, 힘의 가치에도 의존하고 있습니다." 카니 총리의 말이다.
세계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때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혼자서 그럴 힘이 없다면 힘을 모아 가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카니 총리와 같은 혜안을 가진 정치인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dinoh7869@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