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맏형'에서 뮤지컬 배우 '막내'로 변신한 이준형 이야기]
"사랑했던 피겨, 이제 안녕" 지난 4일, 은퇴 6년 만에 늦깎이 은퇴식
4월 전역 후 뮤지컬 복귀 예정…"매 공연 최선을 다하는 배우 되겠다"
[파이낸셜뉴스] 차가운 얼음판 위에서 18년.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수만 번 반복하며 ‘한국 남자 피겨의 맏형’으로 불렸던 청년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고도 정작 본선 무대에는 서지 못했던 피겨스케이팅 전 국가대표 이준형(30) 이야기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스케이트화를 벗고 소리소문 없이 은퇴했던 이준형은 지난 4일 오랜만에 다시 경기의상을 입고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은반 위에 섰다. 2021년, 은반 위가 아닌 대학로 소극장 무대 위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한 그가 약 6년 만에 치르는 '늦깎이 은퇴식'이었다.
"사랑했던 피겨, 이제 안녕" 지난 4일, 은퇴 6년 만에 늦깎이 은퇴식
4월 전역 후 뮤지컬 복귀 예정…"매 공연 최선을 다하는 배우 되겠다"
"스케이트를 사랑해서 탔어요" 한국 피겨 '맏형'의 조용한 마지막
지난 4일, 서울 양천구 목동아이스링크에서 2026 밀라노·코르티나 담페초 동계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KB금융 제80회 전국남녀 피겨 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 겸 국가대표 2차 선발전이 치러졌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과 갈라쇼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 관중석을 가득 채운 피겨 팬들의 이목이 올림픽 출전권의 주인공에게 쏠려있는 그 사이, 이준형은 긴장감 가득한 손끝으로 스케이트의 매듭을 고쳐 묶었다. 공식 은퇴식을 통해 팬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자리. 제프 버클리의 '할렐루야'에 맞춰 마지막 은퇴 갈라를 선보인 그는 체인지 풋 싯스핀으로 연기를 마무리한 뒤 은반 위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몸을 숙여 은반에 입맞춤으로써 자신의 길었던 선수 생활에 작별을 고했다.
이준형은 다른 선수들이 흔히 그렇듯, 아주 어릴 때부터 은반 위에서 살았다. 피겨 선수 출신 코치인 어머니 오지연씨를 따라 은반에 처음 섰고, 7살 때부터 스케이트화를 신고 본격적으로 훈련에 나섰다. 한국 남자 싱글 선수로는 처음으로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고, 2017년에는 ISU 네벨혼 트로피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피겨 남자 싱글 출전권을 따오는 등 그야말로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2019~2020시즌 이후 더 이상 은반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2020 피겨 스케이팅 사대륙선수권 대회를 마지막으로 조용히 스케이트화를 벗었기 때문이다. 연습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결국 코로나로 인해 마지막 시즌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은퇴를 선택했다. 이날 공식적으로 은퇴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그게 '피겨스케이팅 선수' 이준형의 조용한 마지막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슬픔이라기보다, 아쉬움도 있고 오래전부터 (스케이트를) 타왔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제가 이 자리(목동)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렀기 때문에 그 때 생각도 많이 났고요. 그냥 감사하다는 마음이었고, 그동안 얼음에 한 번도 감사하다고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은퇴식에서)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이날 일정을 모두 마친 뒤 목동에서 만난 이준형은 "좀 떨리기도 했고, 준비를 너무 열심히 했는지 스케이트를 타다가 다리에 쥐가 살짝 났다"며 웃었다. 은퇴한 뒤에도 꾸준히 스케이트를 타왔고, 은퇴식이 결정된 뒤로는 퇴근한 뒤 하루에 1~2시간씩 연습하며 준비했지만(그는 현재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 중이다) 현역 시절 기량만큼은 아니다 보니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엔 '피겨 선수'였던 이준형의 자존심도 걸려있다. 그래서 그는 갈라 프로그램에서 점프를 빼지 않았고, 더블 악셀을 깔끔하게 뛰어 큰 박수를 받았다.
“저는 남들보다 잘한다거나 특출난 부분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냥 제가 재미있어서, 또 사랑해서 탄 스케이트기 때문에 돌아보면 항상 즐겁고 행복하게 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와중에 좌절감도 있고 했지만, 그냥 사랑해서 탔던 거죠."
한때 그의 이름 앞을 장식했던 수많은 수식어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겸손한 자기 평가였다. 그러나 이준형은 길었던 만큼 많은 기억이 남아있을 선수 생활을 스케이트에 대한 ‘사랑’ 한 마디로 정의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국가대표 에이스, 대학로의 '신인'이 되다
은퇴 후 그가 선택한 길은 뮤지컬이었다. 이준형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수 차례 오디션을 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2021년, 뮤지컬 '라 레볼뤼시옹'으로 무대에 데뷔했다. 평생 몸으로 말하던 사람이 목소리와 연기로 감정을 토해내는 배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뮤지컬이었을까. 그는 “누군가가 인도해 주듯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정말 넘어갔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아요. 스케이트를 사랑하는 만큼 뮤지컬에 대한 사랑도 굉장히 컸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맨날 (뮤지컬 넘버를) 따라 부르고 했던 것들이 쌓여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면서 새로 시작하는 마음가짐으로 ‘이준우’라는 예명도 만들었다. 과거의 영광에 기대지 않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국가대표’ 계급장을 떼고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다. 은반 위에서는 혼자 모든 것을 준비하고 또 책임지면 됐지만 무대 위는 달랐다. 개인 종목에 익숙한 그에게 ‘함께하는 호흡’은 낯선 숙제였다.
“나 혼자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보니 초반에는 그런 부분에서 어려움이 조금 있었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초반에는 운동할 때처럼 기계적으로 연습하고, 대사나 노래를 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되는데요, 데뷔 후 연차가 조금씩 쌓이면서 서로 교류하고 상대방을 보면서 같이 해나가는 걸 배워가며 성장하지 않았나 싶어요. 특히 무대에서 하는 연기는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피겨에서도 연기를 하다 보니 그런 면에서는 닮은 부분도 있고, 여기에 제 감정을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그는 어엿한 6년차 뮤지컬 배우다. 군입대로 인해 잠시 공백기가 생겼지만, 오는 4월 전역 후 예정된 차기작으로 무대에 복귀할 예정이다. 훌륭하게 인생 2막을 한창 써나가는 그에게, 진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사실 저 최근에도 계속 오디션 떨어지고 그랬거든요. 하지만 그런 경험이 저를 성장시킨다고 생각해요. ‘더 잘해야겠다, 도전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지, 좌절하지 않았고요. 그러니 본인이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해서 확신이 있다면, '죽어도 해 봐야겠다'라는 마음이 있다면 마음 가는 대로 해보시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피겨선수' 이준형에겐 "수고했어", '배우' 이준우에겐 "잘해보자"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준형은 현재 군복무 중이다. 뮤지컬 배우로 자리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긴 공백기가 불안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며 지금의 짧은 휴식을 반겼다.
"그동안은 정말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잠시 떨어져서 예전에 제가 했던 공연 영상도 찾아보고, 다른 공연도 많이 보러 다니다 보니까 지금 이 시간이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부족했던 점이나 앞으로의 목표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제 정말로 피겨선수 이준형을 보내주고, 배우 이준우를 맞이해야 할 시간. 그는 먼저 피겨 선수 이준형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정말 사랑했던 종목이기 때문에 후회 없이 했고, 남들이 보기에도 '정말 좋아해서 스케이트를 타는구나'라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싶다"는 이준형은 "그래서 '잘했다'는 말보다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자신을 도닥였다.
그리고 이제 곧, 다시 무대에 오를 배우 이준우에게는 "잘해보자"는 말을 남겼다. "(배우로서는) 이제 시작이니까, 이 길을 끝까지 쭉 걸어보고 싶다"고 말한 이준형은 "무대에 서는 게 정말 재미있고, 그만큼 더 잘하고 싶다. 그래서 늘, 매 공연마다 최선을 다하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는 다짐을 전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의 1막을 뒤로하고, 2막의 문을 연 사람들을 만납니다. 안정된 과거 대신 가슴 뛰는 불확실성을 택한 이들의 선택은 우리에게 '늦은 때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직업을 바꾸고 삶의 태도를 고쳐 쓰며 마침내 또 다른 나를 발견한 사람들. [괜찮아, 다시 인생]이 전하는 다채로운 삶의 궤적이 당신에게 새로운 영감이 되길 기대합니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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