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를 지탱해온 규범이 무너지고 힘의 논리가 경제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 헌법은 본토나 미군 공격으로 인한 국가 비상사태에만 해외 작전 병력 투입을 허용한다. 그러나 연초 미국은 베네수엘라 대통령 체포를 위해 자국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현지에서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린란드 강제병합을 압박하기 위해 유럽 8개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하며 약탈적 패권의 민낯을 드러냈다.
유럽의 강력한 반발로 다보스포럼 이후 관세 위협을 철회했지만, 패권적 지위로 동맹국의 주권과 영토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국제법과 유엔헌장 기반 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한다.
이러한 행보는 본질적으로 패권적 지위를 이용해 상대에게 비대칭적 이익을 강요하는 '힘의 논리'에 기반한다. 규범 없는 강대국 정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한 '평화위원회' 구상으로 구체화됐다. 당초 가자지구 휴전계획의 일부였으나, 미국은 이를 전 세계 분쟁해결 국제기구로 확대했다. 유엔체제 약화 우려로 서유럽 동맹국 정상은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다.
미국의 동맹국 압박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는 한국 국회의 대미투자특별법 통과 지연을 구실로 한국산 자동차와 주요 품목 관세를 15%에서 25%로 다시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체결한 무역합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방적 통상압박이다. 미국 대법원에서 상호관세에 대한 판결이 진행 중이지만, 사법 판단 후에도 불확실성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무역확장법 232조나 통상법 301조와 같은 다른 법적 권한을 활용해 압박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개인적 야심에서 비롯된 그린란드 지정학의 충격은 베네수엘라 사태, 중동 긴장이 얽히며 글로벌 공급망, 에너지와 금융시장 변동성과 연계된 복합위기 우려를 높이고 있다.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산업에 대한 미국의 관세 위협과 자의적 규제 변경 가능성만으로도 투자의 예측가능성은 크게 낮아지고, 동맹에 대한 안이한 기대가 오히려 위험한 리스크가 되고 있다.
한국은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 경제안보 리스크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 첫째, 단기 효율성 대신 리스크 분산과 시스템 회복력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 에너지·핵심 원자재·첨단 부품에서 한미 공조 단일 축만 상정하지 말고, 다층적 파트너십과 백업 공급망을 확보해야 한다. 둘째, 외교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국제법 존중과 다자주의 옹호, 전략적 자율성 확보를 동시 추구하는 균형외교로 중견국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국제법이 더 이상 패권 남용을 제약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미국 중심 양자 프레임에만 갇히지 않도록 유럽·아세안·인도태평양 중견국과 위기 대응 노력이 시급하다.
국제규범이 침묵하는 시대, 한반도 평화와 경제적 실익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은 치밀한 경제안보 전략과 견고한 회복력이다. 강대국 정치와 힘의 논리를 냉철히 분석하고 새로운 생존전략을 설계하는 일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권율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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