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특파원 칼럼] 정책만큼 무거운 지도자의 말

서혜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2.04 18:39

수정 2026.02.04 19:28

서혜진 도쿄특파원
서혜진 도쿄특파원

지난 1월 31일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열린 첫 주말 중의원 선거 유세 현장.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를 향해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엔저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고 운을 띄웠다. 그는 "수출산업에는 큰 기회다. 외국환자금특별회계 운용도 싱글벙글하는 상태"라고 강조했다.

유세 연설 중에 나온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 여파는 길었다. 언론을 통해 해당 발언이 확산되자 외환시장은 곧바로 반응했다.

이날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대비 1.70엔 상승(엔화가치 하락)한 달러당 154.75엔에 거래를 마쳤다.

다카이치 총리가 다음 날 장 시작 전 "엔저를 환영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시장에서는 정부가 더 이상 엔화가치 방어에 적극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됐다. 이는 곧 엔화 매도심리를 부추겼으며 시장에서는 나흘째 엔저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 느끼는 당혹감은 상당히 큰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연설문에 없던 말"이라며 "애초에 그런 표현이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일본 재무성이 달러당 159엔대의 과도한 엔저 흐름에 제동을 걸기 위해 물밑에서 움직이던 시점에 총리 발언은 관료들의 노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읽혔다. 일본 정부는 이번 총리 발언에 대해 미국 측에도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발언이 특히 주목받은 이유는 일본 국채 금리 급등과 맞물린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지출과 감세 공약으로 재정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엔저와 국채금리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자 미국 측도 우려를 나타냈다. 일본의 금리 급등이 미국 시장의 '트리플 약세'를 촉발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한 나라 지도자의 즉흥적 발언이 국제 금융시장 연결고리를 자극한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솔직함이 다카이치 총리의 인기 요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엔저가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을 키워 생활비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는 상황인데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총리 발언에 대한 찬반이 팽팽하다. 레딧에서는 "식료품비가 비싼 건 엔화 약세 외에도 다른 문제들이 있기 때문" "그동안 업계 관계자들이 엔화 강세에 대해 얼마나 불평했는지 고려하면 일관성이 있는 발언"이라는 등 다카이치 총리를 옹호하는 게시글이 적지 않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솔직함'이 아니라 '신호'를 읽는다. 발언의 맥락보다 방향성을 먼저 해석한다는 점에서 이번 발언이 가져온 리스크는 상당하다.

같은 시기 원화 약세를 겪고 있는 한국에서도 환율을 둘러싼 발언이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원·달러 환율이 조만간 1400원대 수준으로 내려올 수 있다고 언급했다. 발언 직후 환율이 일시 하락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통령의 말이 시장 기대를 조정한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사례를 나란히 보면 지도자의 발언이 환율 기대 형성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카이치 총리는 '엔저의 장점'을 말했고, 시장은 '엔저 용인'으로 해석했다. 이 대통령은 '환율 하락 가능성'을 말했고, 시장은 '원화 안정 의지'로 받아들였다. 정책을 발표하지 않아도, 의도를 밝히지 않아도 시장이 읽은 메시지는 분명했다.

이 점에서 지도자의 발언은 두 개 층의 의미를 갖는다. 국내 유권자를 향한 정치적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글로벌 금융시장에 보내는 정책 신호다. 특히 환율처럼 기대심리에 민감한 영역에서는 지도자의 한마디가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움직일 수 있다.

한국 역시 원화 약세 압력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지도자의 언어가 갖는 무게가 다시금 느껴진다. 언어는 기록으로 남고, 시장은 그 기록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이 미래의 환율을 만든다. 환율은 숫자이지만 그 숫자 뒤에는 말이 있다.
지도자의 말은 정책만큼이나 무겁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