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통로' 그리는 화가 하태임 "색은 형태보다 마음에 닿는다" [아트&컬처]

유선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2.05 14:34

수정 2026.02.05 15:54

하태임 작가.
하태임 작가.

하태임 작가.
하태임 작가.

[파이낸셜뉴스] 추상 회화를 마주한 관람객들은 종종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그러나 하태임 작가의 작업 앞에서 그 질문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의 화면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떤 상태로 머물게 하는가'를 먼저 묻는다.

휘어진 색띠들이 겹치고 흐르며 만들어내는 화면 앞에서 관람객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힘들 때 그림 앞에 오래 머물게 된다"는 말이 그의 전시장에서 반복되는 이유다.



지난 2018년까지 삼육대 미술콘텐츠학과 전임교수로 재직했던 하 작가는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내려놨다.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 작가의 삶도 함께 봐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최근 출간한 첫 에세이 '색채 환상곡'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추상 회화는 구체적인 서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관람객이 작품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는 이 지점에서 '삶'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제 작업은 추상화라서, 일반적인 관람객들이 작품에서 구체적인 내용이나 이야기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작품을 논할 때, 그 작가의 삶도 함께 들여다보아야 이해가 더 빠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에세이는 작업노트이자 생활의 기록이다. 아이를 키우며 작업을 이어온 시간, 몸의 통증과 심리적 균열, 그리고 다시 붓을 드는 순간들이 담담하게 담겨 있다. 본인의 작업이 나오기까지의 감정들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하고 싶었다는 게 그가 출간한 배경이기도 하다.

하 작가의 회화를 규정하는 핵심은 단연 '색'이다. 그는 색을 형태보다 앞선 '표현의 수단'으로 본다.

"색은 그리는 사람의 심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형태보다 색이 더 중요하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의 화면에는 반복되는 구조가 자주 등장한다. 휘어진 만곡의 밴드 형태는 거의 변하지 않지만, 그 위에 얹히는 색은 매번 달라진다. 단순한 구조 위에 다채로운 색의 병치는 화면에 리듬과 긴장을 만든다.

하 작가는 "보는 사람의 색에 대한 기억과 경험이 제 색과 만나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가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 첫 번째 작품은 지난 2017년 개인전에 발표된 작업이다. 이 작품은 이전의 말끔하고 정제된 색띠 작업과 확연히 다르다. 물감이 중력에 의해 흘러내린 흔적들이 화면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하 작가는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 회전근개파열로 심각한 통증을 겪고 있었다. 기존의 작업 방식은 허벅지 높이의 테이블 위에 캔버스를 눕힌 채, 몸을 깊이 숙여 작업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자세는 오히려 그의 몸 상태를 악화시켰다.

벽에 세운 채 작업을 이어가자, 물감은 중력에 의해 흘러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과를 알고 있었음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색띠는 이전과 달리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형태로 남게 됐다.

"작품 크기가 가로 세로 2m가 넘는 대작이었기 때문에, 중간 점검을 위해 벽에 세워두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기존의 강박처럼 깔끔한 작업만 해오던 제 자신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또 다른 대표작은 코로나 시기에 완성됐다. 그 무렵 하 작가는 작고한 친정 아버지와의 부녀전을 준비하며, 아버지의 작품 세계를 깊이 연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추상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푸른색을 즐겨 사용했던 작가였다.

"아버지의 작업을 오마주하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조색을 블루로 잡게 됐습니다."
그러나 작업이 깊어질수록 블루는 점점 더 우울한 톤으로 변했다. 치열하게 작업할수록 마음의 풍경도 점점 가라앉았다. 그때 그는 '블루 위에 핑크를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한 핑크는 화면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놨다.

하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쓸쓸했던 마음의 풍경에 따뜻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느낌"이라고 자평했다. 이후 열린 개인전의 제목 또한 '블루가 핑크를 만나면'으로 짓는 계기가 됐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통로(Un Passage)'라는 제목과 고유번호가 붙는다. 이는 하나의 시리즈를 넘어, 그의 작업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이다. "제 작업이 새로운 내면 세계를 만나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 작가는 삶에서 마주하는 순간들이 그림을 통해 또 다른 풍경으로 전환되기를 바란다. 그의 회화는 완결된 결과물이 아닌, 삶과 감정이 오가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 역시 예술 앞에서 무너졌던 경험들을 기억한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마주한 마티스의 작품,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의 노란색 점면점화. "그림 앞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예술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사람을 압도하고, 동시에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는 오는 4월 일본 도쿄 개인전과 부산 그랜드조선호텔 OKNP갤러리 개인전, 6월 프랑스 파리 개인전을 앞두고, 여전히 같은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좋은 작업은 시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 하 작가는 앞으로도 색의 새로운 조합을 집요하게 실험하며, 글쓰기를 병행할 계획이다. 그림과 글은 그의 삶에서 이미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 중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독자와 관람객에게 에세이의 한 구절을 전한다. 삶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지만, 다시 세워 나갈 수 있다. 즉, 회복은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결심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색을 통해 통로를 만들고, 삶을 다시 건너게 하는 하 작가의 작업은 오늘도 조용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난 하 작가는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포스코미술관, 헬렌 J 갤러리(LA), 갤러리 AP 스페이스(뉴욕), 아트사이드갤러리(베이징), 파리국제예술공동체(Cite Internationale des Arts·파리), 영은미술관, 쉐마미술관, 서울옥션 등 국내외 주요 공간에서 총 37회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300여회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1999년 모나코 국제 현대 회화전에서 모나코 왕국상을 수상했으며, 2024년에는 제10회 전혁림미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해 삼성전자, 서울가정행정법원, 싱가포르 카펠라호텔 로비 등 공공·기업·국제 공간에 폭넓게 소장돼 있다.
특히 카펠라호텔은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