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럽

“늦어서 죄송합니다”... 5연패 뒤 흐른 눈물, 그제야 멈춘 ‘방황하는 스톤’ [2026 밀라노]

전상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2.08 10:37

수정 2026.02.08 10:47

컬링 믹스더블, 벼랑 끝 9엔드… 미국 무너뜨린 ‘마지막 스톤’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승리하고도 쏟아낸 '선영석'의 눈물
“후회 없이 던지겠다”… 남은 3경기, 한국 컬링 ‘자존심’ 건다
미국과의 경기 승리 후 자축하는 김선영과 정영석.연합뉴스
미국과의 경기 승리 후 자축하는 김선영과 정영석.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승리의 기쁨보다 ‘미안함’이 앞섰던 것일까. 믹스더블 김선영(강릉시청)-정영석(강원도청)의 눈가엔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대변하듯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차가운 빙판 위에서 5번이나 넘어진 끝에, 마침내 그들이 원하던 ‘단 1승’의 꽃이 피어났다.

8일(한국시간) 이탈리아 코르티나 컬링 올림픽 스타디움. 김선영-정영석 조는 컬링 믹스더블 예선 6차전에서 미국을 상대로 연장 혈투 끝에 6-5의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스웨덴,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체코에게 연달아 무릎 꿇으며 ‘5연패’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벼랑 끝에서 만난 미국을 상대로 한국 컬링의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줬다.

경기는 롤러코스터였다. 1엔드 선취점, 2엔드 스틸(선공 득점)로 기세를 올린 한국은 7엔드까지 5-2로 앞서가며 낙승을 예감했다. 하지만 올림픽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8엔드, 미국의 무서운 뒷심에 휘말려 대거 3점을 내주며 5-5 동점을 허용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칠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 승부는 연장(9엔드)으로 흘렀다.

미국전 승리 확정되자 기뻐하는 정영석.연합뉴스
미국전 승리 확정되자 기뻐하는 정영석.연합뉴스

연장전 분위기는 미국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미국의 정교한 샷이 하우스를 장악하며 한국을 압박했다. 이때 ‘해결사’들이 깨어났다. 정영석이 파워풀한 샷으로 꽉 막힌 길을 뚫어내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의 순간. 스킵 김선영의 손을 떠난 스톤이 빙판을 가르며 하우스 중앙(버튼)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갔다. 정확한 ‘드로우 샷’. 스톤이 멈추는 순간, 한국의 1승이 확정됐다. 그제야 두 선수는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경기 후 믹스트존에서 만난 김선영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5연패 기간 동안 멘털을 잡기 위해 “대한체육회가 준 맛있는 도시락을 먹으며 버텼다”는 농담 섞인 진담 속엔 그간의 고뇌가 묻어났다.

승리의 주역 정영석은 이날의 ‘베스트 샷’으로 주저 없이 김선영의 마지막 샷을 꼽았다. 파트너의 이 한마디에 김선영은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렸다. “스스로를 너무 구석으로 몰았던 것 같다. 영석이를 믿고 던졌다”는 그녀의 고백은, 컬링이 왜 ‘팀 스포츠’인지를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미국과의 경기에 나선 정영석(왼쪽)과 김선영.연합뉴스
미국과의 경기에 나선 정영석(왼쪽)과 김선영.연합뉴스


비록 4강행은 멀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꺾이지 않는 마음’을 확인했다. 정영석은 “남은 3경기, 국민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경기를 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방황은 끝났다. 영점 조준을 마친 김선영-정영석의 스톤은 8일 오후 6시 5분, 에스토니아를 상대로 연승을 정조준한다.
밀라노의 기적은,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일지 모른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