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자민당 단독 316석. 전후 일본 정치사에서 단일 정당이 중의원 3분의 2를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이 압승은 단순한 선거 결과가 아니라,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새로운 정치적 아이콘의 탄생 선언이었다.
여성 의원 비율이 10%에 불과한 일본 정계에서, 그녀는 부드러운 포용 대신 '서슬 퍼런 선명성'을 무기로 삼았다. 유세 현장마다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인파가 몰렸고, 유튜브 영상 조회 수는 1억 회를 돌파했다. 자민당 지지율은 30%대에 머물렀지만, 다카이치 개인 지지율은 60%를 넘겼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집권 이후의 전환이다. 과거사에서 한 치의 양보 없던 강경론자가 이재명 대통령과 손을 맞잡았다. 감정이 아닌 계산, 이념이 아닌 이익에 기반한 '현실 정치'의 산물이다. 그녀가 꺼낸 카드는 '경제 안보'였다. 122조 엔의 역대 최대 예산, AI·반도체·방위산업 등 17개 전략 분야에 국가 자원을 집중하는 '사나에노믹스'. 이것은 일본 보수층에는 '강한 일본'의 청사진으로, 한국에는 공급망 협력이라는 대화의 통로로 기능했다.
316석의 압도적 권력 기반 위에서 보여준 다카이치의 유연함,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자신감이었다. 그 자신감이 구체적 성과로 이어진 곳이 2026년 1월 나라현이다. 다카이치의 고향에서 열린 두 번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1,500년 전 한반도 교류의 상징인 호류지를 함께 거닐며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응시했다.
진짜 주목할 것은 조세이 탄광 합의다. 1942년, 강제 동원된 조선인 136명을 포함해 183명이 수몰된 참사. 80여 년간 바다 밑에 묻혀 있던 이 비극의 유해가 2025년 8월 발견됐고, 다카이치가 단독 회담에서 DNA 감정 추진을 먼저 꺼냈다. 자국 내 우익의 반발을 감수하면서도 '인도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로 과거사의 물꼬를 트겠다는 결단이었다.
물론 이것이 강제 동원의 진상 규명이나 공식 사과로 곧장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사과와 보상'이라는 끝없는 도돌이표를 벗어나, 양국 정상이 인도주의적 합의를 공동 발표했다는 사실 자체가 과거사 외교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결국 다카이치 사나에의 강한 리더십은 한국에 위기이자 기회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숨기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그녀를 '예측 가능한 파트너'로 만든다. 다만 냉정한 현실 인식은 필수다.
사나에노믹스의 엔저 용인은 수출 구조가 유사한 한국 기업에 직접적 위협이고, 헌법 9조 개정 논의가 본격화하면 역사·안보 갈등이 재점화 될 수 있다. 한국은 감정적 경계 대신, 그녀가 중시하는 '경제 안보'와 '인도주의'를 지렛대 삼아 국익을 극대화하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경주와 나라를 잇는 셔틀 외교는 시작일 뿐이다. 보수의 검과 실용의 방패가 만난 지금, 갈등의 60년을 뒤로하고 협력의 새로운 60년으로, 그 발걸음이 현실이 될지는 결국 양국의 전략적 지혜에 달려 있다.
/김문경(국민대학교 겸임교수·대한리더십학회 부회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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