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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보다 값진 4위"... 차준환, 이탈리아 '전설'의 딸 울린 사연 [2026 밀라노]

전상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2.19 21:00

수정 2026.02.19 21:00

'물랑루즈' 대신 택한 '광인'... 이탈리아 울린 운명의 승부수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당신, 숭고했다"... 전설의 딸이 전한 찬사
희귀 우표와 자필 편지... 밀라노 코리아하우스 찾은 뜻밖의 손님
차준환 "상상도 못한 선물"... 아쉬운 4위를 덮은 '예술적 교감'
무결점 연기를 펼쳐내는 차준환.연합뉴스
무결점 연기를 펼쳐내는 차준환.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0.98점 차.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메달을 놓친 아쉬움은 컸다. 하지만 빙판 위에서 펼쳐진 차준환(25·서울시청)의 연기는 점수판의 숫자를 넘어, 개최국 이탈리아의 심장을 관통했다. 비록 목에 메달을 걸진 못했지만, 그는 이탈리아 전설의 가족에게 '마음의 금메달'을 받았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경기가 끝난 뒤, 밀라노 현지에서는 승부를 떠난 아름다운 만남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차준환의 '승부수'였다.

당초 올 시즌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영화 '물랑루즈' OST를 준비했던 차준환은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바로 지난 시즌 자신과 호흡했던 '광인을 위한 발라드(Balada para un Loco)'를 다시 꺼내 든 것.

"가장 나다운 곡으로 승부하고 싶다"는 차준환의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선택은 우연을 넘어선 운명이었다. 이 곡의 주인공이 바로 이탈리아가 사랑하는 '칸초네의 여왕' 故 밀바(Milva)였기 때문이다.

피겨 차준환이 10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뉴스1
피겨 차준환이 10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뉴스1

지난 13일(현지시간), 차준환은 은반 위에서 밀바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맞춰 격정적인 연기를 펼쳤다. 쿼드러플 토루프 점프 착지 과정에서 넘어지는 실수가 있었지만, 그는 곧바로 일어나 끝까지 연기를 마쳤다. 최종 순위 4위. 한국 남자 피겨 역대 최고 성적을 경신했음에도, 시상대에 서지 못한 아쉬움은 진하게 남았다.

하지만 그 연기를 지켜보며 남몰래 눈시울을 붉힌 이가 있었다. 바로 밀바의 딸, 마르티나 코르냐티 씨였다.

미술사학자인 코르냐티 씨는 15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코리아하우스를 직접 찾았다. 어머니의 노래를 세상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되살려낸 한국의 청년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코리아하우스를 방문한 밀바의 딸 마르티나 코르냐티.연합뉴스
코리아하우스를 방문한 밀바의 딸 마르티나 코르냐티.연합뉴스

밀바의 딸이 차준환에게 선물한 CD 앨범과 우표.연합뉴스
밀바의 딸이 차준환에게 선물한 CD 앨범과 우표.연합뉴스

그녀가 차준환에게 전한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찬사였다.

"경기 중 넘어진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다음에 넘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오히려 넘어진 뒤 다시 일어나 연기를 이어가는 그 모습이... 정말 숭고했습니다."
코르냐티 씨는 "차준환의 연기는 우아했고, 음악과 완벽하게 교감하고 있었다"며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셨다면 나만큼이나 고마워하고 감동하셨을 것"이라고 전했다.

피겨 차준환이 10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 출전해 연기를 펼치고 있다.뉴스1
피겨 차준환이 10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 출전해 연기를 펼치고 있다.뉴스1

그녀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기리며 발행된 이탈리아 희귀 우표 세트와 '광인을 위한 발라드'가 담긴 CD 앨범, 그리고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선물했다. "이 희귀한 우표가 한국의 차준환 선수 집에 소장된다니 자랑스럽다"는 말과 함께.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차준환 역시 감격했다. 훈련장에서 소식을 접한 그는 "상상도 못한 일이라 믿기지 않는다"며 놀라워했다.

차준환은 "오히려 제가 밀바의 음악 덕분에 힘을 받아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다"며 "시간이 없었지만 곡을 바꾼 건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환하게 웃었다.

13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ㆍ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프리 스케이팅에 출전한 차준환이 연기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13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ㆍ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프리 스케이팅에 출전한 차준환이 연기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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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는 서지 못했다. 하지만 차준환은 개최국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가수의 딸에게 "숭고하다"는 찬사를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메달보다 더 빛나는, 피겨스케이팅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해피 엔딩'이 아니었을까.

밀라노의 겨울, 차준환과 밀바의 딸이 나눈 교감은 차가운 빙판을 녹이는 가장 따뜻한 가십으로 남게 됐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