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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슬퍼?” “엄마도 언젠가 죽잖아”..연극 ‘더 드레서’가 던지는 삶의 질문[이 공연]

신진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2.20 10:23

수정 2026.02.20 11:04

'3월1일까지 공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연극 '더 드레서'에서 공연 중인 정동환. 나인스토리 제공
연극 '더 드레서'에서 공연 중인 정동환. 나인스토리 제공

연극 '더 드레서' 공연에서 나서는 박근형(오른쪽), 송승환. 나인스토리 제공
연극 '더 드레서' 공연에서 나서는 박근형(오른쪽), 송승환. 나인스토리 제공

연극 '더 드레서'에서 공연 중인 송승환, 송옥숙. 나인스토리 제공
연극 '더 드레서'에서 공연 중인 송승환, 송옥숙. 나인스토리 제공

[파이낸셜뉴스] “아 못 해, 나 못 해~ 첫 대사가 어떻게 되지?"

1942년, 전쟁 중인 영국의 한 지방 극장. 노년의 배우 ‘선생님’(박근형·정동환)은 227번째 ‘리어왕’ 공연을 앞두고 혼란에 빠진다.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켜 온 드레서 ‘노먼’(송승환·오만석)은 공연을 취소하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무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무대를 포기하지 않는 이가 선생인지 노먼인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듯 선생은 주변 사람들에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네고, 와중에 마침내 공연이 시작된다.

박근형 송승환 정동환 오만석 '더 드레서' 3월1일까지 공연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더 드레서’가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오는 3월 1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작품은 영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로널드 하우드의 희곡이 원작으로, 작가가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에서 5년간 드레서로 일하며 겪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드레서는 오늘날의 의상 담당과 퍼스널 드레서를 합친 직무로, 공연 전후 의상 준비와 분장 보조, 퀵체인지 등을 맡는다. 그러나 작품 속 드레서 노먼은 단순한 스태프를 넘어 오랜 시간 ‘선생님’ 곁을 지키며 헌신적으로 보필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영국 지방을 배경으로, 극단이 셰익스피어 ‘리어 왕’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았다. 무대가 아닌 백스테이지와 분장실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공연이 올라가기까지의 과정과 배우·스태프 사이의 갈등, 현장의 긴장감이 펼쳐진다.

연극 ‘더 드레서’는 ‘리어 왕’ 공연을 앞두고 대사를 잊고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는 ‘선생님’과, 아첨과 설득, 거짓말까지 동원해 무너지려는 배우를 다시 왕으로 세우려는 드레서 ‘노먼’의 분투를 그린다. 배우는 부족하고 공습경보와 폭격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극단은 공연을 멈추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극중극 형식으로 펼쳐지는 작품은 권력을 잃은 뒤에야 진실한 사랑을 깨닫는 ‘리어 왕’의 서사와 ‘선생님’의 현실을 겹쳐 보여주며 복합적인 여운을 남긴다.

선생님과 노먼의 관계가 던지는 삶의 질문

노장 배우들 사이에는 “대사를 외울 수 있다면 작은 역할이라도 끝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말이 있다. 무대가 곧 삶의 이유라는 뜻일 것이다. 극 중 ‘선생님’ 역시 그렇다. 한편으로 이 끝없는 애정은 주도권이 뒤바뀐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무대를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전쟁 속 관객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는 사명감에 오히려 스스로가 무대에 종속돼 있는 듯하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곁에 있는 노먼은 그 신념이자 현실을 더욱 굳히는 존재다. 선생님이 사라지면 자신의 자리도 사라지는 노먼과 선생님의 관계는 단순한 상하관계를 넘어선 공생적·의존적 파트너십에 가깝다.

현실에서 불안정한 선생님에게 노먼은 분장과 대사, 기억과 감정까지 관리하며 배우의 정체성을 유지시킨다. 그러나 그의 헌신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그의 보호가 권력인지 희생인지 분명치 않다.

선생님이 그런 노먼에게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설정에서, 노먼의 반응은 서운함을 넘어 ‘붕괴’에 가까운 충격을 받는다. 규정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관계는 관객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생각을 남긴다. 이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지난 13일 공연 후 한 모녀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훌쩍이는 어머니에게 딸이 “그렇게 슬퍼?”라고 묻자, 어머니는 “나도 언젠가는 죽잖아”라고 답했다. 무대 위에서 스르르 눈을 감는 선생님의 모습은 삶보다 죽음에 가까워진 관객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흥을 남긴 듯했다.

만약 퇴직을 앞둔 '김부장'이라면, 누군가를 위해 살아온 노먼이 존재 이유를 잃는 순간이 더 크게 와닿지 않을까. “자신을 규정해주던 존재를 잃은”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더 드레서’는 군데군데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적 요소도 갖고 있다. 그렇게 웃기지만 결국 비극적인 인간 드라마이자 인간이 왜 역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동시에 배우라는 존재를 해부하고, 전쟁 상황에서도 공연을 이어가는 예술가들의 모습을 통해 예술의 힘과 지속성을 환기시킨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