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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의 기술, 마음의 기술 [부장판사 출신 김태형 변호사의 '알쏭달쏭 상속']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2.23 09:00

수정 2026.02.23 09:00

[파이낸셜뉴스] 특정 재판이 유튜브 등으로 생중계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법정은 더 이상 특정 직역의 공간이 아니다. 시민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진짜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지켜보며, 판사가 어떻게 말을 건네고 어떤 표정으로 판단을 내리는지 생생히 관찰한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이들이 사건 자체보다는 “판사의 재판 진행 스타일”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엄숙하고 근엄하며 진지한 ‘엄근진’ 판사를, 누군가는 재판을 균형 있게 이끄는 ‘사회자형’ 판사를, 또 어떤 이는 말보다 표정으로 법정을 통제하는 ‘입꾹닫’ 판사를 더 이상적으로 여긴다.

판사는 법을 다루는 전문가이지만, 동시에 사람을 다루는 커뮤니케이터이기도 하다.

나는 200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처음 재판을 맡게 된 이후 17년 동안 법정에 섰다. 그 기간 내내 깨달은 것은, 아무리 치밀하게 기록을 파헤치고 판례를 검토해도 재판 당사자의 마음을 100%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재판이란 결국 사람들의 주장을 듣고, 증거를 통해 주장의 무게를 재며, 인정된 사실 위에 법과 판례를 얹어 결론을 내리는 절차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 속에서도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그 변수 중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이다.

많은 젊은 판사들이 재판을 잘하기 위해 기록을 철저히 읽고, 법리와 판례를 완벽히 숙지한다. 물론 그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좋은 재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마이크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말소리가 흐릿하거나, 너무 빠른 속도로 발언하거나, 고개를 숙인 채 서류만 보며 질문한다면 당사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공중으로 흩어진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재판장은 결국 절차의 주체이자 커뮤니케이터다. 말을 또렷하게 하는 법, 당사자나 대리인들과 시선을 맞추는 법, 호흡을 고르는 법은 의외로 소송법 책이 아니라 경험과 연습을 통해 배울 수밖에 없다. 나도 한때는 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당사자와의 시선 처리에 소홀한 상태로 기록을 보면서 재판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 습관을 고치고자 일부러 빈 법정에서 혼자 재판 진행을 연습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덕분에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로부터 우수법관으로 선정된 적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절차적 공정성’뿐 아니라 ‘절차적 존중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재판 운영의 기술에 더해 감정을 다루는 ‘마음의 기술’이 특히 더 필요한 곳이 있었다. 바로 가정법원이다. 수원가정법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는 이혼, 상속, 후견, 아동보호, 가정보호, 소년보호사건 등 사람의 삶의 결을 세밀히 다루는 재판을 맡았다. 가정법원은 법원의 기능 중에서도 ‘후견적·복지적 기능’이 가장 강하게 요청되는 곳이다. 법리를 잘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결혼의 희로애락을 겪어 본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숨결이 있었고, 부모가 되어보아야 헤아려지는 아픔이 있었다. 이 점에서 나는 종종 “인생의 경험치가 곧 재판의 자산”이라고 느꼈다.

미국 영화 Marriage Story에는 이혼 전문 변호사가 등장하는데, 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을 대리할 그 변호사 역시 이혼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열게 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깊은 공감을 느꼈다. 사람은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아픔 앞에서 선뜻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다. 가정법원에서 다루는 사건 대부분은 차가운 법 이전에 인간적 공감이 가장 필요한 영역이다. 그래서 나는 늘 ‘아동보호사건은 아이를 키워 본 판사가, 소년재판은 사춘기 자녀를 둔 판사가, 가정보호재판은 오랜 결혼생활을 통해 인생의 희노애락을 맛본 판사가 제격’이라고 생각해 왔다. 판결의 엄정함도 중요하지만, 그 엄정함이 따뜻한 이해 위에 설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

소년재판을 맡았던 시절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2019년 당시 수원가정법원에는 소년부 판사가 단 두 명뿐이었고, 한 사람당 연간 3,000건 넘는 사건을 처리해야만 했다. 하루에도 수많은 비행소년들을 만나야 했다. 모든 아이들의 사연을 깊이 들여다보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짧은 만남이라도 그들의 눈을 보고 진심을 담아 한마디를 건네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판사가 소년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그 소년도 판사를 믿을 수 있어야 했다. 법정에서 오가는 신뢰의 눈빛이야말로 옳은 처분의 첫걸음이었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형식적으로 진료할 때 느끼는 서운함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법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말 한마디보다 그 말이 건네지는 태도와 눈빛이 먼저 마음에 새겨진다. 나는 어떤 비행소년에게도 최소한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말할 수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비록 실수를 했더라도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이제 변호사로 일한 지 만 2년이 되었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 나는 재판장의 이름을 미리 검색해 본다. 어떤 사람일까. 그가 이 사건을 어떤 마음으로 볼 것인가. 판사의 말이 곧 ‘국가의 말’로 기록되는 공간에서 그 말을 따뜻하게 건네는 법을 아는 판사. 나는 그런 판사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변호사(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변호사(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l 김태형 변호사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이다. 2007년 법관 임용후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17년간의 법관생활을 끝내고 법무법인 바른에 합류했다.
김태형 변호사는 법관시절 2012년부터 총 8년간 가사∙상속 및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법관 퇴직 전 5년(2019~2024)간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가사∙상속 관련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했다.
베스트셀러인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상속, 이혼, 소년심판 그리고 법원"(박영사, 2023)의 저자이기도 하다.

jjw@fnnews.com 정지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