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기'의 종말... 텅 빈 전력망에 쏟아지는 재생에너지의 습격
"전기 팔고 싶어도 못 판다"... 출력제어에 우는 사업자들
생산은 호남, 소비는 수도권... 꽉 막힌 송전망이 부른 '병목 현상'
"전기 팔고 싶어도 못 판다"... 출력제어에 우는 사업자들
생산은 호남, 소비는 수도권... 꽉 막힌 송전망이 부른 '병목 현상'
[파이낸셜뉴스]전력당국의 전력 수급 대응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과거 과거 전력 수급 대책은 하절기 폭염과 동절기 한파에 따른 ‘수요 폭증’ 대응에 집중됐었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는 현재의 전력계통에서 진짜 시험대는 오히려 봄·가을이다. 전력 수요는 연중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태양광 발전량은 크게 늘어나는 ‘저수요·고공급’ 구조가 반복되면서 전력망의 물리적 안정성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경부하기, 전통적 ‘비수기’의 의미 변화
28일 기후에너지환경부에 따르면 봄철 낮은 전력 수요에 대비한 ‘2026 전력 수급 안정화 대책 기간’을 이달 28일부터 6월 14일까지 총 107일간 운영할 예정이다.하지만 2020년대 들어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재생에너지 보급이 가속화되면서 전력 계통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현재 국내 태양광 설비 용량은 약 20GW(비계량 자원 포함 시 30GW 이상)에 달한다. 이는 여름이나 겨울의 피크 수요를 감당하는 데는 기여하지만, 전력 소비가 적은 봄과 가을에는 오히려 전력망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공급 과잉'의 원인이 되고 있다.
전기는 쌀이나 석유처럼 창고에 쌓아둘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생산과 소비가 실시간으로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전력은 실시간 수급 균형이 깨질 경우 곧바로 주파수 변동으로 이어진다.
전력망 운영의 핵심은 주파수 유지다. 우리나라 전력계통은 60헤르츠(Hz)를 기준으로 운영된다. 발전량이 수요를 초과하면 주파수가 상승하고, 부족하면 하락한다.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발전기와 산업 설비에 손상이 발생할 수 있고, 보호장치가 작동해 설비가 자동 차단될 경우 광역 정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계통 운영을 담당하는 한국전력공사와 한국전력거래소는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경부하기 대책기간 동안 발전기 출력 조정, 예비력 관리, 재생에너지 출력제어 등 선제적 조치를 강화한다. 발전소 정비 일정도 계통 상황에 맞춰 조정된다. 즉, 대책기간은 단순한 ‘점검’이 아니라 실질적인 운영 전략이 집중되는 시기가 됐다.
출력제어 일상화와 정책적 딜레마
봄철 낮 시간대 태양광 발전이 급증하면 일부 발전소는 계통 안전을 위해 출력을 줄이거나 정지해야 한다. 이른바 ‘출력제어’다. 출력제어는 기술적으로는 불가피한 조치지만, 정책적으로는 고민을 안긴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독려해 놓고 실제로는 발전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사업자 수익성이 악화된다. 장기적으로는 투자 위축과 시장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출력제어 보상 체계가 정교하지 않을 경우 갈등은 더욱 커질 수 있다.
결국 경부하기 대책기간은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과 계통 수용 능력 간의 간극을 조정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단기적 안정화 조치와 중장기적 제도 개선 논의가 동시에 이뤄지는 배경이다.
봄철 경부하기의 또 다른 위험은 ‘계통 관성’ 저하다. 석탄·가스·원자력 발전기는 대형 터빈이 회전하면서 물리적 관성을 제공한다. 이는 외부 충격이 발생했을 때 주파수 변동 폭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태양광·풍력은 전력변환장치를 통해 계통에 연결되기 때문에 전통적인 관성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저수요 시기에는 대형 발전기의 가동률이 낮아진다. 이로 인해 계통 전체의 관성 수준이 떨어진다. 작은 설비 고장이나 송전선 사고에도 주파수가 급격히 흔들릴 가능성이 커진다. 전력이 남는 상황에서도 대형 정전 리스크가 존재하는 이유다. 대책기간 설정은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감안해 예비력 확보 수준을 상향 조정하고, 비상 대응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다. 필요할 경우 일부 발전기를 의도적으로 가동해 관성을 유지하는 전략도 검토된다.
송전망 병목과 지역 불균형
우리나라 전력 수요의 상당 부분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반면 발전 설비는 비수도권에 다수 위치한다. 태양광 역시 농지·임야가 많은 지역에 몰려 있다. 봄철 낮 시간대 남는 전력을 수도권으로 원활히 보내야 하지만, 송전망 건설 지연과 지역 수용성 갈등이 발목을 잡는다.
송전 용량이 부족하면 발전소는 계통 접속이 제한되거나 출력제어를 반복해야 한다. 이는 발전사업자와 지역경제에 부담을 준다. 동시에 계통 운영 비용은 증가한다. 결국 이러한 비용은 전기요금 체계와 직결된다.
경부하기 대책기간은 송전 혼잡 관리와 계통 보강 계획을 점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단기 운영 대책과 중장기 인프라 투자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전문가들은 봄철 경부하기 대응의 핵심을 ‘유연성’에서 찾는다.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활용해 낮 시간대 잉여 전력을 저장하고 저녁 시간대로 이동시키는 방식은 대표적 대안이다.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은 빠른 출력 조정이 가능해 변동성 대응에 유리하다. 수요반응(DR)을 통해 산업체가 전력 사용을 조정하는 방식도 보완책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단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계통은 경직성을 띠게 된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유연성 자원에 대한 투자와 시장 보상이 강화돼야 하는 이유다. 경부하기 대책기간은 이러한 자원의 가동 준비 상태를 점검하는 시험장이다.
이재식 기후부 전력망정책관은 “안정적인 전력망 운영을 위해서는 전력망에 연결된 모든 발전원의 관측·제어가 중요하다”면서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와 전력수요 변동에도 전력망 불안정 우려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밀한 전력수급 및 계통 운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기후·환경과 에너지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입니다.
에너지의 생산 방식에 따라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거나, 반대로 기후나 환경의 변화가 에너지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줍니다. [이유범의 에코&에너지]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 기후·환경 및 에너지 이슈를 들고 매주 토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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