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후손 이종찬 광복회장이 생각하는 '3·1 정신'
대한민국 108년
3·1운동,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계층·성별·지역 초월한 만세시위
단순한 항일 저항에 그치지 않고
화이부동·평화·인도주의를 담아
기억의 역사
우당 이회영 선생이 李회장 조부
혹독함을 견디며 구국운동 전념
3·1절 명칭은 날짜만 기념할 뿐
역사가 기억할 분명한 이름 필요
대한민국 108년
3·1운동,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계층·성별·지역 초월한 만세시위
단순한 항일 저항에 그치지 않고
화이부동·평화·인도주의를 담아
기억의 역사
우당 이회영 선생이 李회장 조부
혹독함을 견디며 구국운동 전념
3·1절 명칭은 날짜만 기념할 뿐
역사가 기억할 분명한 이름 필요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도, '민주공화'라는 정치 체제도, 태극기와 국가도 이어졌습니다. 우리 헌법 전문 역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은 1919년을 단지 '과거의 사건'으로 두지 않는다. '국가가 어디에서 시작됐는가'에 대한 답은, 국가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계승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를 경험한 시간
그는 권력의 구조를 아는 사람이지만, 지금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권력이 아닌 '1919년'이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전환된 모멘텀이 바로 3·1운동이라고 밝힌 그는 3·1운동을 단순한 항일 저항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국민이 주권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국가의 형식을 '제국'에서 '민국'으로 바꿔 세운 정치적 전환점으로 해석한다. 특히 3·1정신의 핵심을 묻자 이 회장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정신과 세계평화 구현 정신"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화이부동'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공동의 목표 앞에서는 하나가 되는 태도를 뜻한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기독교·천도교·불교 지도자들이 함께 이름을 올렸던 장면이 그 상징이기도 하다. 종교도, 배경도 달랐지만 목표는 '자주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만세 시위는 계층과 성별, 지역을 초월해 확산됐다.
그는 "임시정부에도 다양한 정당과 단체가 존재했지만, 의견은 달랐다"면서 "하지만 독립이라는 목표 앞에서는 한목소리를 냈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체제"라고 부연했다.
■화이부동, 분열의 시대를 향한 경고
그러나 이 회장은 곧바로 현재로 시선을 돌리며 "우리 사회가 계층·세대·지역 간 단절이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러면서 "정치가는 차고 넘치는데 정치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정치는 권력다툼이 아닌, 공동체의 목표를 설정하고 합의하는 능력이다. 3·1운동은 그 가능성을 이미 보여줬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1919년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 질서가 재편되던 시기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등장하면서 약소 민족들도 스스로의 운명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3·1독립선언을 보편 가치에 대한 선언으로 분석한다.
"자유와 평화, 정의와 인도주의를 표방한 3·1정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가 규정한 3·1운동은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동시에 세계를 향한 호소였다. 1919년을 국내 사건이 아니라 국제사회 속에서 대한민국이 스스로를 선언한 해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거슬러 올라 이 회장의 역사인식은 가족사에서 출발한다. 그의 조부인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은 조선 명문가 출신이었다. 권력과 재산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그는 그 길을 거부했다.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고 감리회로 개종한 이 선생은 청상과부가 된 누이를 개가시키는 결단으로 관습을 거슬렀고, 사상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이 선생은 여섯 형제와 가족, 해방한 노비까지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전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자금은 약 40만원, 726필지 266만평에 달했다. 그 돈은 독립운동의 기반이 됐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했고,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졌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혹독했다. 재산은 소진됐고 가족은 극심한 궁핍을 겪었다. 1918년 대한제국 고종의 해외 망명을 추진했으나 무산됐고, 이후 임시정부 활동과 아나키즘 노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32년 중국 다롄에서 체포돼 고문 끝에 순국했다.
과거 조부의 구국운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피로 쓰인 역사는 혀로 덮을 수는 없다'는 문장을 평생 가슴에 새긴 이 회장은 이 문장이 '가문의 기억'이자 '국가의 기억'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특별한 희생에는 특별한 예우가 있어야 합니다. 예우는 복지가 아니라, 기억의 방식입니다." 이 회장이 주장한 '1919년을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인정한다면, 그 출발을 가능케 한 희생 역시 국가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 회장은 '3·1절'이라는 명칭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3·1절'은 날짜만 남아 있다"며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 직관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데, '3·1독립운동'처럼 의미가 분명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은 단순한 용어 정비의 차원이 아니다. 이름은 기억을 조직하는 방식이고, 기억은 곧 역사인식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3·1절'이라는 표현은 3월 1일이라는 시간만을 남긴다. 그러나 '3·1독립운동'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날의 성격과 행위, 주체가 드러난다. 독립을 요구했고, 국민이 거리로 나왔으며, 주권을 선언했다는 사실이 언어 속에 환히 복원되는 것이다. 이 회장은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을 예로 든다. 이 사건들은 날짜와 함께 '혁명' '민주화' '항쟁'이라는 성격을 드러내는 명칭을 갖고 있다. 그 이름들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닌,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는 역사적 정의다. 반면 '3·1절'은 기념일의 형식은 갖췄지만, 그 정치적 함의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 회장이 규정한 3·1운동은 단지 독립을 요구한 사건이 아니었다. 국민이 스스로를 주권자로 선언한 최초의 집단적 경험이었다. 제국의 백성이 아닌, 공화국의 시민으로 서겠다는 결의였다.
■해방 81년,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
그는 그 지점을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후의 민주화 운동들은 각기 다른 시대적 조건 속에서 전개됐지만,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선언의 계보 위에 놓여 있다는 설명이다.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는 곧 무엇을 중심에 놓을 것인가의 문제다. '날짜를 기념할 것인가' '정신을 계승할 것인가'. 이 회장은 후자를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명칭은 사소해 보이지만, 세대가 바뀌고 기억이 옅어질수록 언어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이름이 의미를 담고 있어야 역사가 자연스럽게 전승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3월 1일을 쉬는 날로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공화국의 시작을 선언한 날로 기억할 것인가'. "해방 이후 81년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고, 세계와 경쟁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우리 국민은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다시 1919년으로 돌아간다.
"이번 3·1절에는 독립선언서를 꼭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가 권한 독립선언서에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는 위대한 문장이 쓰여 있다.
광복회관 전광판의 숫자는 '대한민국은 언제 시작됐는가'를 묻는다. 이 회장의 답은 분명하다. "1919년입니다. 그리고 그 선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 이종찬 광복회장 약력 △1936년생 △경기고 △육군사관학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제11·12·13·14대 국회의원 △정무 1장관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국가정보원장 △미 이스트웨스트 센터 및 하버드대학교 연구원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 △광복회 이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 △(재)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운영자문위원장, 육군사관학교 석좌교수, 제23대 광복회장, 독립기념관 이사, 광복8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민간 공동의원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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