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터진 우중간 적시타… 공격의 혈 뚫은 '바람의 손자'
9회초 실책 유도한 전력 질주… 집념으로 쥐어짜 낸 '기적의 1점'
메이저리거의 묵직한 존재감… 위기마다 빛난 타선의 중심
"이제 나의 무대 미국으로"… 마이애미 폭격 예고한 거침없는 출사표
[파이낸셜뉴스] 세상에 이런 바보 같은, 그리고 이토록 위대한 헌신이 또 어디에 있을까.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선언되고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의 8강 진출이 확정된 순간, 1억 1300만 달러(약 1464억 원)의 사나이는 글러브로 얼굴을 감싼 채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그가 흘린 뜨거운 눈물은, 지난 몇 년간 한국 야구의 '참사'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에이스의 뼈저린 회한이자, 처음으로 주장의 완장을 차고 기적을 이뤄낸 캡틴의 벅찬 환희였다.
이번 대회에서 이정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보여준 투혼은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는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1천억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슈퍼스타다. 굳이 국제대회에서 자신의 몸을 혹사하며 부상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선수다.
그러나 가슴에 새겨진 태극마크 앞에서 그의 몸값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1차전 체코와의 경기에서 발목을 다치는 불운을 겪었음에도,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전, 5-8로 뒤져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가려던 8회에 그는 단타를 치고도 2루를 향해 미친 듯이 전력 질주했다.
발목의 통증조차 잊은 채 팀의 죽어가는 불씨를 살려내려던 그 처절한 질주는 동료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다.
운명의 호주전에서는 수비 하나로 대한민국 야구를 구원했다. 1사 1루의 벼랑 끝 위기 상황, 타자의 배트 중심에 맞은 타구가 우중간을 향해 총알처럼 날아갔다. 빠지면 곧바로 실점으로 이어지고 8강 진출의 꿈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이정후는 몸을 던져 그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걷어냈다.
이미 실점을 허용해 더그아웃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택연과 마운드에서 극도의 긴장감과 싸우고 있던 젊은 투수 조병현을 동시에 지옥에서 건져 올린, 말 그대로 '구국의 수비'였다. 천문학적인 액수를 받는 선수가 찰나의 순간 주저함 없이 인조잔디 위로 몸을 내던지는 이 비현실적인 장면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번 대회에 임했는지를 완벽하게 증명한다.
사실 이정후에게 국가대표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가 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한 이래, 한국 야구는 번번이 국제대회에서 고배를 마셨다.
처음으로 주장의 중책까지 맡은 이번 대회에서 그가 느꼈을 억눌린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경기가 끝난 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믹스트존에 선 이정후는 "나는 '참사'의 주역일 수 있어도, 과거 '왕조'의 주역인 류현진 선배님도 계셨고, 또 밑에는 새로운 왕조를 써 내려갈 젊은 선수들이 있기에 그 긍정적인 기운이 더 강했던 것 같다"며 승리의 영광을 선배와 후배들에게 돌렸다.
이어 그는 "박해민 형, 저, 고우석, 김혜성 등 좋지 않은 국제대회 성적을 기록했을 때 함께했던 멤버들끼리 그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며 "오늘 그 지독했던 악연의 고리를 우리 손으로 같이 끊어낸 것 같아서, 함께 뛰어준 선수들에게 너무나 고맙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목이 메었다.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지만, 그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대표팀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려 했다.
1464억 원의 가치를 가진 선수가 발목 부상에도 2루를 향해 질주하고, 동료를 구하기 위해 다이빙 캐치를 하며, 승리가 확정되자 글러브에 얼굴을 묻고 오열한다. 우리는 지금, 압도적인 실력뿐만 아니라 그 헌신과 책임감마저 역대 최고인 진정한 '캡틴'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이정후의 눈물과 함께 한국 야구의 잔혹사가 마침내 끝났다. 위대한 주장이 이끄는 류지현호의 다음 정착지는, 약속의 땅 마이애미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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