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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케이 이마즈 "거리란 분리가 아닌, 사유 위한 조건" [인터뷰]

유선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3.12 16:06

수정 2026.03.12 16:06

타데우스 로팍 서울 기획전 '거리의 윤리(Distancing)'
케이 이마즈.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케이 이마즈.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파이낸셜뉴스] "거리란 분리가 아니라, 사유를 위한 조건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 반둥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여성 작가 케이 이마즈(Kei Imazu)의 작업은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의 이미지들이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전쟁의 잔해와 신화적 인물, 식민지의 기억과 일상의 몸짓이 한 장면 안에 겹쳐지며 단선적인 역사 서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케이 이마즈는 12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타데우스 로팍 서울 기획전 '거리의 윤리(Distancing)'에 참여한 계기에 대해 "작업을 한국적 맥락 안에 놓아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 마음이 이끌렸다"고 밝혔다.

케이 이마즈 '보랏빛 거래'.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케이 이마즈 '보랏빛 거래'.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현재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올해 첫 전시인 '거리의 윤리' 작가로 케이 이마즈를 비롯해 김주리, 임노식, 마리아 타니구치(필리핀)를 선정, 신작 회화 19점과 조각 1점을 선보이고 있다.

오는 5월 2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이미지와 물질, 신체와 시간의 관계가 관람자의 감각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고 경험되는지를 탐색한다.

케이 이마즈는 "최근 몇 년 동안 작업의 중심에 놓여 있는 질문은 기억의 역사와 이주, 그리고 식민주의의 잔재가 아시아라는 공간 속에서 어떻게 다시 구성되는가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한국 관람객들과 공유하는 데 의미를 느낀다는 그는 전시에 출품한 신작 총 3점을 두고, "서로 다른 도상을 취하고 있지만 모두 '제국주의와 여성상'이라는 공통된 주제에 닿아 있다"고 말한다.

우선, 대표작 '화로와 난파(2026)'는 필리핀 해저에 가라앉은 '해골 난파선'이라 불리는 일본 군용 보급선의 잔재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볼 수 있는 화로 앞에 서 있는 듯한 여성의 형상이 하나의 화면에서 함께 펼쳐지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잊혀진 전쟁의 역사와 이름 없는 일상의 리듬을 하나의 회화 공간 안에 나란히 놓고자 했다"며 "거대한 역사의 파편과 일상을 지탱하는 여성의 신체를 교차시킴으로써 평범해 보이는 풍경 이면에 역사적 폭력이 어떻게 침전되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했다"고 부연했다.

인도네시아 신화 속 일곱 선녀, 육두구와 정향, 그리고 식민지 무역선 바타비아(Batavia)호와 함께 침몰한 유물들을 모티프로 삼은 '보랏빛 거래(2026)'도 향신료 무역 이면에 자리한 제국주의적 욕망을 다룬다.

아름답고 장식적인 식물의 외형 이면에는 분류와 수집, 지배와 착취로 점철된 이동의 체계가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는 평가다. 케이 이마즈는 "지배와 착취의 체계와 이토록 깊숙이 얽혀있는 역사를 신화 속 여성 인물들과 연결지었다"며 "이것은 인간에게 날개옷을 도둑맞아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목욕하는 선녀 이야기가 어떻게 자연과 환상을 환기하는 동시에 투영된 욕망으로 상징되는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아름다움 이면에 있는 권력의 존재를 고요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작품인 '밟는이, 그녀(2026)'는 사자 위에 올라타 전장에 나서는 팔이 여럿 달린 힌두 여신 두르가를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작품이다. 바다를 건너 인도에서 인도네시아로 온 신화적, 종교적 도상들이 서로 다른 역사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지 주목한 것이다. 그는 "여신상은 단순히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이동과 해석 그리고 변형의 흔적 그 자체"라며 "이 이미지를 신체와 이를 지지하는 알루미늄 프레임, 골반과 같은 구조적 요소들과 연결함으로써, 이미지가 어떻게 유지되고 전시되며 제도화 되는지를 고찰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케이 이마즈 '화로와 난파'.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케이 이마즈 '화로와 난파'.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그가 작품들에 표현한 제국주의의 역사는 단지 국가나 전쟁, 무역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여성의 신체와 재현, 노동, 그리고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화면에 등장하는 여성 형상은 신화 속 여신이기도 하고, 이름 없는 일상의 인물이기도 하다. 욕망의 대상이거나 통제의 대상으로 재현된 여성 이미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역사 구조를 드러낸다.

일본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삶 역시 시선에 변화를 가져왔다.

"특정 장소의 역사나 도상에 접근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지 실감하게 됐습니다. 대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히려 그것을 정확히 포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거리(distancing)'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거리란 단순히 떨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사유를 위한 조건입니다. 대상이 너무 가까우면 제대로 볼 수 없고, 너무 멀면 그 사이를 상상으로 채워버리게 됩니다."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로 삶의 무게 중심을 옮기며 역사와 기억이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이때 '거리두기'는 무관심이 아닌,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계속 되묻는 태도에 가깝다.

작업은 광범위한 자료 수집에서 시작된다. 서적과 사료, 아카이브 자료, 온라인 이미지, 지도, 영화,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 박물관 유물 등이 그 출발점이다.

"처음부터 고정된 결론을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나 이해되지 않지만 계속 남는 이미지들에 주목합니다."
수집된 자료들은 디지털 공간에서 콜라주처럼 겹쳐지고 배열되며 서로의 관계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친 뒤 회화로 옮겨진다. 회화는 정보를 정리하는 매체라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기억을 하나의 장소에 머물게 하는 방식에 가깝다.

최근 작업에서 특히 의식하고 있는 문제 역시 역사와 연결된다. 케이 이마즈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적 폭력"이라면서 "세계사를 관통해 온 지배와 수탈, 침략의 구조는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현재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부연했다.

그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작업을 이어가는 일이 때로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고 밝힌 그는 이러한 현실을 단순한 의미로 축소하지 않으려 한다. 층층이 쌓인 도상과 시간의 간극을 화면 안에 남겨 두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역사와 기억은 고정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계속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래서 하나의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간과된 파편들과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데 관심을 둔다.

"작품을 통해 관람객에게 역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풍경 아래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층위를 드러내고 싶습니다." 작업은 회화뿐만 아닌, 설치, 조각, 디지털 매체를 넘나든다. 매체를 먼저 정해놓고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정 이미지나 주제를 담기에 가장 적절한 형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매체가 자연스럽게 선택된다는 것이다.

케이 이마즈 '밟는 이, 그녀'.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케이 이마즈 '밟는 이, 그녀'.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케이 이마즈는 앞으로 식민주의 역사와 해양 산업, 신화적 도상에 관한 질문을 더욱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식물과 동물, 해류와 같은 '비인간 존재'들이 역사 서사의 화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명확한 답을 얻기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고 관람객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그는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의 시대 속에서 작업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 곁에 머무르는 시간을 요청한다.

"단번에 보이지 않는 것들 곁에 머무르며 거리감을 통해 사유를 지속하는 일이 지금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거리의 윤리'는 작품을 읽어내기보다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감각의 간격을 만들어 내는 전시로 남는다.

결국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것은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정답이 아니다. 서로 다른 시간과 이미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한 걸음 물러설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 전시는 바로 그 감각을 관람객들에게 건넨다.

한편, 이번 전시는 네 작가의 서로 다른 밀도와 방식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도록 설계됐다. 마리아 타니구치의 작업은 반복과 축적을 통해 시간의 물성을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드러낸다. 2008년부터 이어온 벽돌 회화 작업을 통해 그는 반복되는 행위와 노동이 화면 위에 남기는 흔적,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편차를 가시화해 왔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2026년작 '무제(Untitled)' 역시 특정 서사를 앞세우기보다 격자 구조 속에서 시간과 노동, 신체의 개입이 하나의 물리적 상태로 축적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반복은 명상적 은유라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가깝다. 관람객들은 화면 앞에서 초점을 맞추고 흐리기를 반복하며 의미를 즉시 해독하기보다 머무름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어지는 김주리의 작업은 물질과 신체, 공간의 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흙이다. 그러나 여기서 흙은 고정된 조형 재료가 아니라 젖음에서 응고로, 생성에서 퇴적으로 끊임없이 상태를 바꾸는 과정적 물질이다.

이번 전시에는 수분을 머금은 흙의 현재를 공간에 펼쳐 놓는 조각 '모습 某濕_202602(Wet Matter_202602)'와 균열과 퇴적의 흔적을 평면 위에 응축한 회화 연작 '사막(desert)'이 함께 놓인다. 폐벽돌과 부서진 흙, 암석 등을 채집하고 분해해 다시 쌓아 올리는 제작 과정은 생성 이후 잔해와 퇴적의 단계까지 작업 안으로 끌어들이는 절차다. 이때 조각과 회화는 별개의 장르라기보다 물질이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두 장면처럼 읽힌다.

임노식의 작업은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 사건과 감각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기류와 변화의 상태를 회화로 구축한다. 그는 대상을 그린 뒤 오일 파스텔로 투명한 층을 덧입히며 지우기보다 경계를 흐리는 방식으로 화면을 만든다.
이번 전시에 나온 '여주-풍경 49(Yeoju-Landscape 49)'에서는 이전보다 한 걸음 가까워진 시선이 감지된다.

형상들은 서로 스며들고 밀어내며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고, 경계는 흐려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화면 앞에서 관람객들은 다가가고 물러서기를 반복하며, 거리란 단순한 물리적 간극이 아니라 관계의 밀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