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상가 1층 실내 66㎡ 규모
장기 둘 수 있는 34석 '오픈런'
장기 둘 수 있는 34석 '오픈런'
19일 오후 12시께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1층. 박모씨(78)는 '탑골 어르신 문화 놀이터'에서 지인과 오전부터 장기를 두었다. 박씨는 "집에 있을 땐 중간중간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눈이 잘 안 보이고 힘든데, 이곳에 오면 눈도 잘 보이고 담배도 덜 피우게 된다"며 "한참 웃고 떠들면 기분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낙원상가 1층에 마련된 실내 공간이 노인들의 새로운 '장기 성지'로 떠올랐다. 종로구청이 지난 2월 2일 낙원상가 1층에 탑골 어르신 문화 놀이터를 마련한 결과다. 앞서 종로구청은 지난해 7월 31일 탑골공원 안팎에서 바둑·장기 등 오락 행위와 흡연, 음주가무 등을 전면 금지했다.
점심시간 어르신 문화 놀이터는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로 붐볐다. 오전 11시30분께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의 행렬이 이어졌으며 20평(66㎡) 규모 실내에 마련된 34석은 금세 만석이었다. 몇 초 간격으로 곳곳에서 장기 알이 '탁' 오르는 소리가 울렸고 승패가 날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군아" "장을 받아라"는 외침도 들렸다. 자리를 잡지 못한 노인들은 구경하며 훈수를 두거나 자리가 빌 때까지 근처 벤치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이들은 서로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볍게 목례하거나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자리에 앉을 때는 기다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 확인했다. 처음 본 사이일 땐 "어디에 사시느냐" "식사는 하셨냐"고 묻고 근처 무료 급식소에 가서 같이 밥을 먹자고도 이야기했다. 김모씨(80대)는 "서로 목소리를 높여서 싸우거나 술을 마신 노인이 이곳을 찾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며 "한 번 지면 잠깐 자리를 비워주고 잘 못해도 나무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곳이 노인 복지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장기를 두던 한 노인은 "학교에 다닌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매일 찾아온다"면서 "집에 있으면 밥도 잘 안 먹게 되고 밖에 나오면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돈인데 여기에선 그 모든 것을 무료로, 즐겁게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박모씨(80대)도 "안전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장기를 둘 수 있는 게 그저 기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어르신 문화 놀이터가 노인들의 바람직한 놀이 문화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들이 건전한 방식으로 예의를 지키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됐다"며 "노인 고립을 예방하고 인식을 개선하는 효과도 있다"고 평가했다.
jyseo@fnnews.com 서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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