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730억달러 투자·SMR·희토류 협력 카드 총동원
트럼프, 직접적 안보 요구 대신 ‘우호 분위기’
이란 사태 장기화 시 트럼프 추가 압박 가능성
대규모 프로젝트에도 기업 부담 확대..수익성 관건
트럼프, 직접적 안보 요구 대신 ‘우호 분위기’
이란 사태 장기화 시 트럼프 추가 압박 가능성
대규모 프로젝트에도 기업 부담 확대..수익성 관건
【파이낸셜뉴스 도쿄=서혜진 특파원】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21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미일 정상회담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가운데 일본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는 평가가 대체로 우세하다. 중동 정세라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양국 간 충돌 없이 회담을 마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다만 회담의 본래 의제였던 대중 전략, 대만 문제, 인도·태평양에서의 미국 관여, 관세 문제 등은 이란 정세에 가려지며 성과와 함께 과제를 남겼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란 변수’에 흔들린 의제
미국 워싱턴D.C.에서 지난 19일(현지시간) 열린 정상회담은 당초 일본이 구상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전개됐다. 일본은 중국 대응, 대만 문제, 관세 협상 등을 중심으로 논의를 준비했지만, 회담 직전 미국의 이란 공격으로 중동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의제의 중심이 이란과 호르무즈 해협 문제로 이동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요구를 할지 알 수 없다”는 경계감이 컸다. 특히 공개석상에서 자위대 파견 등 민감한 요구가 제기될 가능성이 우려됐다.
그러나 실제 회담에서는 이러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일본에 강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다르다”고 언급하며 비교적 우호적인 평가를 내놨다.
NHK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친밀한 분위기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오자키 마사나오 관방 부장관도 회담 직후 기자들과 만나 “두 번째 회담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신뢰를 느꼈다”며 “성공적인 회담이었다”고 밝혔다.
다카이치 총리 역시 21일 귀국 도중 자신의 X(엑스·옛 트위터)에 “미일 동맹을 한층 강화하고 양국 경제 발전을 위한 구체적 방향을 확인한 뜻깊은 방문이었다”며 “트럼프 대통령 및 관계 각료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고 밝혔다.
■‘경제 카드’로 충돌 최소화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안보 분야의 직접 대응 대신 대규모 경제 협력을 전면에 내세운 전략이 유효했다고 평가했다.
일본은 약 730억달러(약 109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2차 계획을 비롯해 소형모듈원전(SMR), 가스발전 프로젝트, 희토류 공급망 협력, 미국산 원유 공동 비축 등 이른바 ‘경제 패키지’를 제시했다. 안보 분야에서도 요격미사일 SM3 블록2A 생산 확대와 미사일 공동 개발·생산 등을 제안했다.
특히 희토류 공급망 협력과 미사일 생산 확대는 각각 미국의 경제안보와 군사적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평가된다.
중국이 희토류를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만큼 공급망 다변화는 시급한 과제다.
미사일 생산 확대 역시 미군이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요격 미사일로 방어하는 과정에서 비축량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어 신규 생산 확대 또는 타국 지원을 통해 보완해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미국과 걸프 국가들이 패트리엇 미사일만으로 연간 생산량의 두 배에 달하는 1000발 이상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미국 측에서는 부족한 물량을 보충하기 위해 해외에 배치된 전력을 재배치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국제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회담은 경제와 경제안보에 중점을 둔 것이 특징”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 분야에서 성과를 쌓으며 회담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구마노 히데오 제일생명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인터뷰에서 “경제협력에 초점을 맞추려던 일본 정부의 전략이 효과를 발휘했다”며 “이란 정세로 우려됐던 미국의 협력 요구가 전면에 부각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문제 미룬 회담'이란 평가도..불확실성 여전
다만 긍정적 평가와 함께 신중론도 적지 않다. 이번 회담은 ‘충돌을 피한 회담’이지만 동시에 ‘문제를 미룬 회담’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추가 요구다. 전문가들은 이란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일본이 더 강한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 랜드연구소의 제프리 호넝 국가안보연구부 일본 담당 선임연구원은 “이란과의 전쟁이 계속될 경우 일본은 더 강한 요구에 직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니컬러스 세체니 선임연구원도 “다카이치 총리가 법적 제약 속에서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지가 향후 과제”라며 “국내 절차가 지연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협력 역시 불확실성이 남는다. 대미 투자 2차 사업의 구체적 내용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가 공개한 공동 문서에 따르면 2차 사업 규모는 최대 730억달러(약 109조원)로 지난달 발표된 1차 프로젝트(360억달러)의 두 배를 넘는다.
SMR 사업은 미국 에너지기업 GE 버노바와 일본 기업 히타치가 테네시주와 앨라배마주에 건설하며 규모는 400억달러에 달한다. 펜실베이니아주와 텍사스주에 예정된 천연가스 발전 사업도 각각 170억달러, 160억달러 규모지만 참여 기업은 공개되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는 “세부 내용이 완전히 확정된 상태는 아니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을 의식해 큰 틀에서 정리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알래스카 원유 인프라, 대형 원자로, 첨단 디스플레이 공장, 구리 정련 시설, 데이터센터용 배터리 등 추가 후보 사업도 거론됐지만 수익성 검토가 완료되지 않아 이번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민간 참여 ‘관건’…수익성 우려 확대
일본 민간 기업과 금융기관 사이에서는 정부 주도로 단기간에 대규모 사업이 잇따라 제시되자 부담을 느끼고 있다.
한 일본 대형 은행 간부는 닛케이에 “단계적으로 자금을 투입하더라도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익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SMR은 양산 체제가 구축되지 않으면 건설 비용 절감이 어렵다. 디스플레이 공장 역시 인력 확보와 판로 문제로 2차 사업에서 제외됐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도 과거 관민 펀드가 해외 인프라 사업에서 손실을 낸 사례를 들어 유사한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지난 2018년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추진된 폭스콘 LCD 공장 투자 계획은 대폭 축소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구마노 이코노미스트는 추가 사업안으로 거론된 알래스카산 원유 인프라에 대해 “미국산 원유를 활용한 조달 다변화는 의미가 있지만 비용 등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구체화되지 않은 사업을 전제로 한 낙관적 전망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엔저로 대미 투자 비용이 상승하고 정책 변화에 기업이 휘둘릴 위험도 있다”며 “경제안보 논리가 수익성과 경제적 합리성을 앞서는 점은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닛케이는 “지난해 일본의 대미 직접투자는 639억달러로 전년 대비 16% 감소했고 대미 수출도 4% 줄었다”며 “민간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미일 동맹의 실질적 기반도 약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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