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왜군이 베어간 조선인의 존엄… 사죄 않는 역사는 진행형 [전경수의 요지경 日本]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3.31 18:40

수정 2026.03.31 19:05

⑧풍신수길과 코무덤

'얼굴의 정중앙' 코를 전리품으로
타인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행위
잔혹함 가리려 비총 대신 이총 명기
코무덤 보이는 곳에 토요토미 좌상
희생자 위령제에 일본인들도 보여
한일관계 악업의 실타래 풀 출발점
교토 풍국신사 정문 앞에 안치된 '풍신수길공지상'(豊臣秀吉公之像). 이 좌상은 도제이고, 석등 지주부에 '풍국(豊國)'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교토 풍국신사 정문 앞에 안치된 '풍신수길공지상'(豊臣秀吉公之像). 이 좌상은 도제이고, 석등 지주부에 '풍국(豊國)'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전남 진도에 적을 둔 '왜덕산 사람들'이 귀무덤공원(耳塚公園)에서 개최한 제5회 코무덤 평화제에서 굿을 하고 있다. 사진=전경수 교수
전남 진도에 적을 둔 '왜덕산 사람들'이 귀무덤공원(耳塚公園)에서 개최한 제5회 코무덤 평화제에서 굿을 하고 있다. 사진=전경수 교수

10여년 전 '남경대도살' 전시 현장에서, 1937년 백인참수를 경쟁하는 일본군 장교의 사진과 우웨이샨(吳爲山)의 기억 조각 작품들이 340년 전 정유재란의 역사를 소환했다. 사령 저주가 두려운 공양의 심성이 민간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사체 훼손을 서슴지 않는 역사적 현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앞세웠던 임진왜란 때는 많은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갔고, 정유재란 때는 코사냥이 문제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부하들의 전리품 평가를 조선인 코의 숫자로 판정했고, 그 결과로 남은 교토 동쪽에 위치한 '귀무덤'이라는 이름의 코무덤이 물증이다.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코무덤 조성 300주년인 1898년에 건립한 석비에는 "베어서 끊어낸 적의 코" "1598년 9월 28일 명복을 비는 공양" 등의 글자들이 읽힌다. 히데요시가 9월 18일 사망, 열흘 후 코무덤 공양을 한 모양이니,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차였다.



■'이총'은 잔혹함을 가리려는 의도

유학자 하야시 라잔의 '풍신수길보'(1658년)에 '이총'으로 명기한 것이 현재 통용되는 이름의 시초이며, 아키사토 리토의 '도명소도회'(1780년)에도 '이총'으로 기록됐다. 비총을 이총으로 개명한 이유는 표현의 잔혹함을 가리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토요토미에서 토쿠카와로 권력 교체기,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는 방광사의 대불 재건을 완성했고(1604년), 그때 주조했던 범종의 명문에 '국가안강'(國家安康)이라는 네 자를 새겼다. 이에야스(家康)는 이 글자들의 배열이 자신의 몸통을 베는 저주의 의미가 담겼다고 의심했다. 이 사건이 비화되어 오사카성과 히데요시의 흔적들은 모조리 파괴되었으니, 코무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남긴 유일한 '유형' 유산인 셈이다. 1615년 히데요리 모자가 자살함으로써 토요토미가(家)의 멸망이 코무덤 저주의 결과라는 전승도 있다.

공양과 진혼의 주술만으로는 불안하였던 모양이다. 황기 2600년에 추가한 것이 풍국신사 문전에 있는 히데요시의 도제좌상이고, 좌상의 시선이 코무덤 제압을 겨냥하고 있다. 조선인 코무덤의 저주가 팔굉일우의 신국 건설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을 우려한 흑주술인 셈이다. 이 좌상은 1995년 한신대지진 때 대좌가 파괴되어 창고에 유치됐다가 새로운 천황의 등극이라는 택일에 맞추어 2019년 5월 1일에 재공개됐다. 코무덤과 관련된 주술은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사령의 재앙과 진혼의 공양이 반복하는 일본 역사의 심성구조를 읽을 수 있다.

돌출된 높이를 감안하면, 벤 코를 염적한 목제통들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봉분을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유재란 때 종군했던 승려가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는 "1597년 10월 2~3일자에 조선인의 코가 수다히 생겼다"고 적었다. 벤 코를 납품하고 받은 영수증에 해당되는 '비청취장'(鼻請取狀)의 연구사는 "쿠로다 나가마사의 손에 토벌당한 적의 머리 대신 코의 수령증"이라고 기록했다. 양산왜성을 축성한 쿠로다의 졸개들이 양산 사람들의 코를 베었던 결과다. "1597년 8월 16일부터 10월 9일 사이에 28통의 비청취장을 발급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왜장마다 수급자별로 코의 숫자를 집계하는 작업이 비청취장 발급이었고, '이쿠사메츠케'(軍目付)가 그 직을 담당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년)은 "정유년에 왜적이 침범할 때, 왜졸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죽이고, 코를 베어 소금에 담가서 수길에게 보냈다"고 기록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고, 남원성에서 포로가 되었던 강항의 '간양록'에도 "히데요시는 왜장들에게 머리 대신 코를 베어오게 하였으므로 왜군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죽이고, 그 코를 베어 소금에 담가서 보냈다. 남원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코를 베어 전공을 세우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 코무덤의 연구 결과 정유재란 시 왜군들이 조선의 삼남지방에서 베어간 코 숫자는 최소한 21만이 넘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시 합산한 사망자 숫자와 동일하다.

전리품으로서 머리를 대신하는 코. 코를 벤 이유는 장거리 운반을 생각해 무게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기능적인 이유로 코가 선택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일본문화론 속에서 사람의 코가 갖는 상징성에 무게가 실린다. 도가사상에서는 "콧속의 기운은 주간에는 왼쪽에, 야간에는 오른쪽에 있다. 자정의 교대 시에는 두 코가 통한다. 도교의 숨결 수련에서 옥관(鼻孔)을 동시에 여는 옥동쌍개를 말한다". 기(氣)가 담긴 코를 베어 갔으니, 코를 잃고 생존한 사람의 황망스럽고 참담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타인에게 자신을 의도적으로 강조할 경우, 일본인들은 검지로 자신의 코를 가리키는 비언어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하기 때문에, 일본인의 자아는 코를 통하여 재현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타인을 통하여 확인되는 주체로서의 개인이지만, 얼굴의 정중앙에 위치해 입체미를 살린 코가 개인의 핵심적 상징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다. 코를 벤다는 행위는 타인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것이다.

■한일 합동 코무덤 조사단 결성해야

1597년 조선에서 코베기를 한 왜군과 1937년 '남경대도살'의 일본군의 행위 과정을 직시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코베기'와 '도살'의 행위주체와 그들의 사상과 신앙을 주목한다. 인류전쟁사에 유례없는 왜군·일본군의 잔학상은 그에 상응하는 진솔한 사죄를 기다리고 있다. 여권과 비자가 없는 사령에게는 공양도 필요하다.

2016년 초 후쿠오카 카스이엔 옆 언덕에서도 귀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돌로 만든 높이 1.2m 정도의 사당 양쪽 기둥에 '괵총'(괵塚)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괵(괵)은 '귀를 베다'라는 뜻이다. 이 귀 무덤들이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과 연관되는 것을 보면 정유재란 때 베어온 조선인의 코나 귀가 일본땅의 여기저기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진도에서 조직된 '왜덕산 사람들'이라는 단체가 수년간 교토의 코무덤 앞에서 '코무덤 평화제'라는 위령제를 지냈는데, 재일동포 단체들과 소수의 일본인이 참가하는 모습을 보았다.
진도의 단골네가 살풀이 굿과 씻김굿으로 동참했다. 어느 스님께서 수년 전 일본에 있는 코무덤 하나를 어렵사리 경남 사천시로 이장하였는데, 정유재란 시 일본에 조성됐던 조선인 코무덤의 전모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코무덤의 원상태가 흩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22년 9월 24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왜덕산 아래에서 무한사죄를 선언하는 현장도 보았다. 만시지탄의 감이지만, 한일 합동의 '코무덤 조사단' 결성이 열도와 반도 사이의 얽히고설킨 악업의 실타래를 풀어주는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왜군이 베어간 조선인의 존엄… 사죄 않는 역사는 진행형 [전경수의 요지경 日本]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