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김도열의 테크 오디세이] 깃발을 든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자동차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4.11 07:00

수정 2026.04.11 07:00

AI혁명의 시대, 사피엔스의 마지막 항해-3편

훗날 롤스로이스를 공동 창립하는 '찰스 롤스(Charles Rolls)'가 1896년형 푸조를 운전하고 있는 모습. 차량 앞에는 붉은 깃발을 든 남자가 걸어가고 있는데, 이는 1865년 제정된 '적기조례'를 준수하기 위함이다. 자동차가 보행자의 속도를 넘지 못하도록 강제했던 당시의 과도한 규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훗날 롤스로이스를 공동 창립하는 '찰스 롤스(Charles Rolls)'가 1896년형 푸조를 운전하고 있는 모습. 차량 앞에는 붉은 깃발을 든 남자가 걸어가고 있는데, 이는 1865년 제정된 '적기조례'를 준수하기 위함이다. 자동차가 보행자의 속도를 넘지 못하도록 강제했던 당시의 과도한 규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파이낸셜뉴스]3초면 시속 100㎞를 돌파하는 800마력의 페라리. 그 앞을 붉은 깃발을 든 남자가 걸어가고, 괴물 같은 머신은 그 뒤를 엉금엉금 따라간다. 아무리 엔진이 비명을 질러도 사람보다 앞서가는 것은 불법이다. 가장 빠른 기술이 가장 느린 제도 앞에서 숨을 죽인 이 기막힌 모습. 19세기 영국에서 실재했던 '적기조례(Red Flag Act)'가 현재까지 이어졌다면 벌어질 풍경이다.

산업혁명의 종주국 영국은 이미 1830년대에 증기 버스를 상용화할 만큼 압도적인 기술을 자랑했다. 그러나 1865년, 의회는 자동차 최고 속도를 시속 3~6㎞로 제한하고, 차 앞에 붉은 깃발을 든 기수를 걷게 하는 황당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명분은 시민의 안전과 도로 파손 방지였다. 하지만 이면에는 지저분한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차 조합, 말 사육업자 등 이른바 '말(Horse) 산업 카르텔'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의회를 압박한 결과였다. 기득권이 권력을 앞세워 혁신의 경기장 자체를 망가뜨린 것이다.

이 악법이 30년간 영국의 도로를 지배하는 동안, 대가는 참혹했다. 천재 엔지니어들은 떠났고, 자동차 산업은 빙하기를 맞았다. 반면 규제의 족쇄가 없던 독일의 벤츠, 미국의 포드는 무섭게 질주하며 세계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 결과 영국의 20세기는 자동차 수입국이라는 굴욕의 연속이었다. 기득권을 지키려다 국가의 미래 먹거리를 통째로 걷어차 버린 뼈아픈 실책이다.

160년이 지난 지금,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엔진 앞에서 또 다른 카르텔이 붉은 깃발을 만지작거린다. 일론 머스크 등 전문가들이 주도했던 'AI 개발 6개월 유예 서한'이나, 일부 국가의 챗GPT 차단 조치가 그랬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 저작권, 가짜 뉴스 등 그들이 내세우는 안전의 명분은 타당하다. 하지만 규제 담론의 이면을 직시해야 한다. 검색 시장을 장악한 거대 IT 기업들, 지식의 가치 하락을 두려워하는 집단 등 현대의 '지식 카르텔'이 자신들이 준비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타인의 발걸음을 멈추려 하는 것은 아닐까?
산업혁명의 발상지이자 증기기관의 종주국이었던 영국은 이미 19세기 초, 말이 끄는 마차의 시대를 넘어설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사진 속 장면은 말의 힘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증기 동력 차량을 시험 운행하던 초기의 모습이다. 거대한 보일러와 투박한 바퀴를 단 이 기계는 아직 서툴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문명의 서막을 알리는 충격적인 풍경이었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이자 증기기관의 종주국이었던 영국은 이미 19세기 초, 말이 끄는 마차의 시대를 넘어설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사진 속 장면은 말의 힘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증기 동력 차량을 시험 운행하던 초기의 모습이다. 거대한 보일러와 투박한 바퀴를 단 이 기계는 아직 서툴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문명의 서막을 알리는 충격적인 풍경이었다.

물론 안전장치는 필요하다. 기술이 폭주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안전벨트'는 필수다. 그러나 그것이 바퀴를 굴러가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규제를 핑계로 "어차피 법으로 막힐 테니 AI를 몰라도 된다"며 나태해지는 것은, 적기조례만 믿고 마차를 몰던 영국의 마부와 다를 바 없다. 기술은 흐르는 물과 같아 한 곳을 막으면 결국 둑을 터뜨리고 만다.

붉은 깃발을 흔들며 머뭇거리는 사이, 경쟁국의 페라리는 보란 듯이 깃발을 치워버리고 앞서 달려나가고 있다. 마차 시대에 벌어진 30년의 격차가, 초고속 AI 시대에는 단 3개월 만에 돌이킬 수 없는 국가의 운명으로 갈릴 수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낡은 마차 위에서 깃발 든 사내의 부활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틈틈이 익힌 기술로 운전대를 잡고 가속 페달을 밟을 것인가. 두렵더라도 과감히 붉은 깃발을 꺾고 나아가야 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혁명은 결코 뒤를 돌아보며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김도열 웹케시그룹 미디어전략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