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여기 오면 만났는데, 이젠 다 흩어졌어"...장기판과 함께 사라진 노인들의 일상 [낮은 곳의 기록자]

한승곤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4.12 06:00

수정 2026.04.12 06:00

[탑골공원이 비춘 초고령사회 노년의 현실]
공원 정비 나선 종로구, 장기판 없애고 음주땐 과태료
대신 낙원상가에 '어르신 놀이터'... 하루 60명꼴 이용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한 노인이 비 내린 산책로를 걷고 있다. 장기판이 사라진 뒤 공원 풍경도 달라졌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진=한승곤 기자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한 노인이 비 내린 산책로를 걷고 있다. 장기판이 사라진 뒤 공원 풍경도 달라졌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진=한승곤 기자

탑골공원 장기판이 사라진 뒤 노인들의 발길도 흩어졌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노인들은 머물 자리와 안부를 나눌 공간이 줄었다고 말했습니다. 초고령사회 도심에서 노인들이 어디에 머물고 어떻게 관계를 이어가는지, 공원 변화가 드러낸 노년 공간의 현실을 짚었습니다. <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예전에는 여기 오면 하루가 갔어요. 사람도 만나고 말도 섞고 그랬죠."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만난 노인 김모 씨(78)는 공원 안을 둘러본 뒤 이렇게 말했다. 이날은 비가 내려 공원이 더 한산했다.

정자 주변과 산책로에는 몇몇 노인만 오갔고 오래 머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공원 담장에는 금주구역 안내문과 '탑골공원을 아껴주세요'라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종로구는 지난해 11월 탑골공원 내외부를 관내 제1호 금주구역으로 지정했다. 이어 지난달 1일부터 음주 행위 등에 1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구는 3·1운동의 상징 공간이라는 역사성을 되살리고 무분별한 음주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고, 원각사지 십층석탑 보존 환경 개선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거리의 장기판들은 종로구에서 관리하는 시설로 이전됐다.

낙원상가로 옮겨간 장기판, 돌아오지 않는 공원의 하루

공원 정비의 취지는 분명했지만, 노인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박모 씨(82)는 "예전에는 오면 늘 아는 얼굴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흩어졌다"고 말했다. 이모 씨(75)도 "(공원에서) 앉아서 이야기할 데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잠깐 둘러보다 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공원 가장자리에서 장기와 바둑을 두던 자리는 별다른 비용이나 절차 없이 드나들며 시간을 보내고, 다른 노인과 자연스럽게 말을 섞고, 하루를 보내던 자리였다.

다만 노인들이 아예 갈 곳을 잃은 것만은 아니다. 종로구는 탑골공원 인근 낙원상가 1층에 '탑골 어르신 문화놀이터'를 지난 2월 열었고, 3월부터는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17개 테이블과 장기·바둑판이 마련됐다. 구에 따르면 개관 이후 누적 방문객은 1124명, 하루 평균 이용 인원은 60명 수준이다. 공원 인근에서 만난 김모 씨(78)는 "비 오거나 추울 때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그건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모 씨(69)는 "거기는 일부러 찾아가야 하고, 예전처럼 공원에서 사람들 얼굴 보며 그냥 섞이는 맛은 덜하다"고 했고, 이모 씨(75)도 "공원은 지나가다 들러도 됐는데 거기는 느낌이 다르다"고 말했다.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담장에 공원 내·외부 금주구역 안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종로구는 2026년 4월 1일부터 탑골공원과 국가유산지정구역 내 음주 행위에 과태료 10만원을 부과하고 있다.사진=한승곤 기자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담장에 공원 내·외부 금주구역 안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종로구는 2026년 4월 1일부터 탑골공원과 국가유산지정구역 내 음주 행위에 과태료 10만원을 부과하고 있다.사진=한승곤 기자

탑골공원이 비춘 초고령사회 노년의 빈자리

탑골공원에서 들린 노인들의 아쉬움은 한 공원만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한국 사회에서 노년의 일상 자체가 이미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2024년 10월 발표한 2023년 노인실태조사를 보면, 경로당 이용 비율은 26.5%로 2020년보다 낮아진 반면 친목 단체 참여 비율은 54.2%로 높아졌다. 제도권 시설 이용은 줄고, 동년배를 중심으로 한 관계 활동의 비중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분석에서도 확인된다. 연구원은 2024년 11월 보건복지포럼 '노인의 가족 및 사회적 관계'에서 2023년 노인실태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노인 단독가구의 고착화와 혈연 중심 관계망의 축소, 동년배 중심 관계망의 강화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사회적 고립 위험이 높은 노인에 대한 정책적 관심을 강화하고, 동년배 관계를 유지·강화할 수 있는 지원과 비공식 돌봄을 보완할 장치의 다양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내놨다. 조사처는 2023년 11월 '초고령사회 대응을 위한 노인관련 법·제도 개선방안 모색' 자료에서 노인을 연령 기준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다양한 욕구와 사회적 배경을 지닌 집단으로 봐야 한다고 정리했다. 베이비부머의 노년 진입, 건강 노화 추세, 여가·문화 활동에 적극적인 액티브 시니어 확대가 이미 진행 중이라는 진단도 담겼다.

결국 초고령사회로 갈수록 노년층이 일상적으로 머물고 관계를 이어갈 공간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탑골공원에서 나온 아쉬움도 이런 변화와 맞닿아 있다. 노인이 어디에 머물고 누구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지, 또 이런 변화를 뒷받침할 정책을 어떻게 마련할지가 함께 논의돼야 한다는 의미다.

노인이 머물 자리, 동네서 찾는다

다른 나라들은 노인 문제를 시설 숫자만 늘리는 방식보다 생활권 안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구조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영국 국가보건서비스는 '사회적 처방'을 통해 사람들을 지역 활동과 모임, 서비스에 연결한다고 설명한다. 싱가포르는 주거지 가까이에 액티브 에이징 센터를 두고 운영하고 있고, 정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223개 센터가 운영 중이며 노인 10명 중 8명이 집 가까운 곳에서 센터를 이용할 수 있다. 일본은 2024년 4월부터 고독·고립 대책 추진법을 시행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관계 단절 문제를 함께 다루는 체계를 마련했다.

한국도 제도 정비에 나서고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되는 생활권 대책은 여전히 촘촘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사람들이 모이던 자리가 먼저 비워졌고, 이를 대신할 공간과 구조는 뒤늦게 따라가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탑골공원에서 낙원상가로 장기판이 옮겨간 뒤에도 노인들이 말하는 핵심은 같았다. 실내 공간이 생긴 것과, 지나가다 들러 안부를 나누고 한나절을 보내던 공원의 기능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담장에 공원 질서 유지와 출입시간 안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장기판이 사라진 뒤 공원 풍경도 달라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사진=한승곤 기자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담장에 공원 질서 유지와 출입시간 안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장기판이 사라진 뒤 공원 풍경도 달라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사진=한승곤 기자
보호를 넘어, 지역사회 안의 노년으로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인을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견해도 나온다. 기대수명이 길어지고 건강 노화 추세가 뚜렷해지면서, 노년층을 일률적인 복지 수요 집단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가족 중심 관계망이 약해지고 1인 가구와 동년배 중심 관계가 늘어나는 현실을 감안하면, 노인을 지역사회 안에서 관계를 맺고 역할을 이어가는 구성원으로 다시 봐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노년의 삶을 시설 수용이나 돌봄 서비스 차원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머물고 만나고 참여할 수 있는 구조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올해 1월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와 대한노인회, 한국노년학회가 공동으로 연 정책토론회 '존엄한 노후를 위한 새로운 길을 묻다'에서도 제기됐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초고령사회 노인정책이 노인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두는 데 머물러선 안 되며, 지역사회 안에서 관계와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다시 설계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중 1위이며, 노인혐오, 차별 등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며 "모든 세대를 위한 세대통합적 사회 구축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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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g@fnnews.com 한승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