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점 잃은 23세 마무리와 믿음이라는 환상에 갇힌 벤치… 결국 KBO 최초의 불명예로 이어졌다
[파이낸셜뉴스] 스포츠에서 벤치의 '믿음'은 종종 기적을 낳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하지만 그 믿음이 합리적인 근거를 잃고 맹목적으로 변할 때, 그것은 선수와 팀 모두를 멍들게 하는 치명적인 '아집'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 14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맞대결에서 한화 이글스 벤치가 보여준 투수 운용은 냉정하게 말해 후자에 가까웠다.
이날 한화는 7회까지 5-1로 앞서며 낙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선발 문동주의 5이닝 무실점 역투가 돋보인 경기였다.
하지만 8회말 2사 1, 2루 상황에서 4아웃 세이브를 위해 등판한 마무리 김서현은 벤치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제구가 극도로 흔들리며 밀어내기 볼넷 2개와 폭투로 3점을 헌납했다. 8회에만 무려 22개의 공을 던지며 볼넷 3개를 내준 투수를 9회에 다시 마운드에 올린 것은 상식적인 운용의 궤를 벗어난 결정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9회 첫 타자 승부를 보고 난 이후에는 교체를 해주는 것이 정석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9회에도 제구를 잡지 못한 김서현은 안타와 사사구를 남발하며 1사 만루 위기를 자초했고, 끝내 밀어내기 볼넷 2개를 연거푸 내주며 5-6 역전을 허용했다. 투수는 그제야 황준서로 교체됐다. 이날 김서현은 1이닝 동안 볼넷 6개, 사구 1개를 내주며 완벽하게 자멸했다.
올 시즌 6이닝 동안 무려 12개의 볼넷을 내주며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 2.83, 평균자책점 9.00을 기록 중인 투수를 1점 차 피 말리는 승부처에 계속 방치한 것은 '믿음'을 넘어선 가혹한 '방임'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김서현에게 집착해야 하는가. 벤치의 꺾이지 않는 아집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김서현이 현재 마운드 위에서 겪고 있는 멘탈 붕괴와 아픔의 무게를 구단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2025시즌의 김서현을 기억한다. 주현상의 부진 속에 갑작스레 마무리 중책을 맡아 33세이브(평균자책점 3.14)를 올리며 팀을 7년 만의 가을야구로 이끈 훌륭한 투수였다. 하지만 정규시즌 1위가 걸려있던 10월 1일 SSG 랜더스전 9회에 투런포 두 방을 맞고 역전패를 헌납한 충격은 20대 초반의 어린 투수에게 거대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한국시리즈 3차전 구원승 직후 흘린 눈물과 "야구장이 랜더스필드처럼 보였다"는 그의 뼈아픈 고백은 그가 감당하고 있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여실히 증명했다.
그 상처는 결국 라이언 와이스의 7.2이닝 1실점 쾌투를 잿더미로 만든 한국시리즈 4차전 역전 3점포 허용으로 이어졌다. 한화 팬들의 가슴에 여전히 큰 생채기로 남아있는 그날의 실패는,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선수를 가장 부담스러운 자리에 계속 세워둔 대가였다.
그런데 올해 초반, 한화 벤치는 또다시 똑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시속 160km의 강속구를 던지는 전체 1순위 유망주라고 해서 무조건 마무리를 맡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넣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투수를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기용하는 것은 팀의 승리를 포기하는 행위이자, 선수 본인의 야구 인생을 망가뜨리는 처사다. 지금 한화의 불펜진에 9회를 맡을 투수가 오직 김서현 한 명뿐인 것도 아니다.
지난 한국시리즈에서는 김서현이 살아나지 않으면 우승할 수 없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단기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페넌트레이스이고, 시즌 초반이다. 한화에는 상위지명으로 얻어낸 수많은 유망주 투수들이 있다. 이런식으로 경기를 내다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연패 중에 말이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믿음의 야구' 서사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김서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승패를 짊어지는 9회의 중압감이 아니라, 부담 없는 상황에서 잃어버린 영점을 되찾고 상처받은 멘탈을 치유할 절대적인 시간이다.
한화 벤치가 "꼭 김서현이어야만 한다"는 치명적인 고집을 버리지 못한다면, 작년 가을의 뼈아픈 실패는 올해 대전벌에서 또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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