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몰래 알약을 반으로 쪼갰다"… '머리숱'과 '남자' 사이의 잔인한 양자택일
[파이낸셜뉴스] 매일 아침 화장대 앞. 마흔다섯 살의 직장인 박 모 씨는 세면대에 수북이 빠진 머리카락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서랍 속 탈모약을 꺼내 든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린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지 반년, 머리카락이 빠지는 속도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박 씨는 또 다른 치명적인 상실감을 마주했다. 아내와의 잠자리에서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박 씨는 "풍성한 머리숱을 지키려다 남자의 구실을 잃어버린 기분"이라며 "약을 끊자니 머리가 빠질까 두렵고, 계속 먹자니 우울증마저 올 것 같다"고 토로했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들에게 탈모는 피하고 싶은 노화의 징수이자 가혹한 스트레스다. 이를 막기 위해 수많은 가장들이 매일 알약을 삼키지만, 그 이면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은밀하고도 서글픈 양자택일의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
■ "머리카락과 맞바꾼 활력"… 4050 남성 덮친 가혹한 양자택일
현재 의학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고 효과가 입증된 탈모 치료법은 경구용 치료제 복용이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탈모를 유발하는 DHT(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로 변환되는 과정을 억제하는 원리다. 하지만 이 기전은 피할 수 없는 그림자를 동반한다. 성욕 감퇴, 발기 부전, 그리고 원인 모를 만성 피로와 무기력증이다.
사회적 지위가 흔들리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4050 시기에 맞닥뜨리는 성기능 저하는 남성들에게 단순한 신체적 부작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머리숱을 잃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남성성의 상실은 존재 자체를 뿌리째 흔드는 거대한 우울감으로 이어진다.
■ 심리적 위축인가, 실제 부작용인가… 의학 데이터와 '노시보 효과'의 덫
그렇다면 이 치명적인 부작용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 것일까.
피부과 및 비뇨의학과 전문의들은 실제 임상 데이터에서 성기능 관련 부작용이 나타나는 비율은 1~3% 내외로 매우 낮다고 설명한다. 복용을 중단하면 대부분 정상으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학계가 주목하는 것은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다.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불안감과 심리적 위축 자체가 실제 기능 저하를 유발한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4050 특유의 업무 스트레스와 자연적인 남성 호르몬 감소가 맞물리면서 현상을 더욱 악화시킨다. 하지만 이유가 심리적이든 기질적이든, 매일 밤 침대 위에서 좌절감을 겪어야 하는 당사자에게 확률이나 데이터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
■ 아내에게도 말 못 할 속앓이… 오늘도 거울 앞을 서성이는 남자들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 고통의 크기를 더욱 키운다. 아내에게조차 부작용을 고백하기 꺼려 혼자 몰래 처방받은 약을 반 알로 쪼개 먹거나, 며칠씩 약 복용을 거르며 혼자만의 실험을 거듭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탈모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머리카락을 택할 것인가, 남자를 택할 것인가"를 묻는 자조 섞인 질문들이 매일같이 쏟아진다.
탈모와 활력 저하, 어느 쪽을 선택하든 중년 남성에게는 뼈아픈 상실이다. 오늘도 수많은 4050 가장들은 출근 준비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서서 조그만 알약 하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청춘의 끝자락을 붙잡으려는 서글픈 투쟁의 시간, 정답 없는 딜레마 속에서 남자의 아침이 또 한 번 조용히 밝아온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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