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이사회 회의실에 앉아 있는 CEO를 상상해보자. 슬라이드에는 경쟁사의 AI 도입 현황이 빼곡히 펼쳐져 있고, 전문 컨설턴트는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3년 더 뒤처진다"고 말한다. 그 순간 결정을 내리는 건 전략이 아니라 공포다.
2026년 경영진의 심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해야 한다."
FOMO(Fear Of Missing Out)는 원래 마케팅 세계의 용어였다.
PwC의 2026 글로벌 CEO 서베이는 이 현실을 다음과 같은 수치로 말한다. 95개국 CEO 4,45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56%가 "지난 1년간 AI 투자에서 매출 증가도, 비용 절감도 경험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반면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달성한 선도 그룹은 전체의 12%에 불과했다. 더 주목할 것은 이 숫자를 알고도 AI 투자를 계속 늘리는 CEO들이 대다수라는 사실이다. 실패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이 답의 상당 부분은 FOMO에 있다. "경쟁사가 벌써 선제 도입했다더라", "디지털 혁신에서 뒤처지면 5년 뒤 회사가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이성적 판단을 압도하는 순간,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계획 없는 대규모 투자, 성급한 구조조정, 그리고 조직의 침묵이다.
두 개의 사례를 통한 하나의 경고
아마존(Amazon)은 2025년 10월 1만4,000명을 감원한 직후, 2026년 1월 다시 1만 6,000명을 추가로 감원했다. 반년도 안 되는 기간에 3만 개에 가까운 일자리가 사라진 셈이다. 공식 이유는 "조직 효율화와 AI·자동화를 통한 생산성 제고"였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달랐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 없이 구조조정이 먼저다", "누가 다음 대상이 될지 몰라 회의실이 조용하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세계 최고 수준의 AI 인프라를 갖춘 기업에서 조차 전략보다 FOMO가 앞섰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국 기업이 읽어야 할 교훈이 있다. 구조조정의 언어를 'AI 효율화'라는 모호한 슬로건에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업을 접고, 어떤 역량을 지키며, 어떤 영역에 새로 투자할 것인지 구체적인 그림이 먼저다. 그 그림을 직원과 투자자에게 솔직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어떤 구조조정이든 공포 정치로 읽힌다. AI를 명분으로 인력 조정을 고민한다면, "왜 줄이는가?"보다 "무엇을 키우기 위해 줄이는가?"를 먼저 말해야 한다.
또한 구글(Google)의 사례는 더 미묘한 신호를 준다. 2025년 구글 인사·성과 담당 부사장은 내부 미팅에서 "지난 1년 사이 관리자를 35% 줄였다"고 밝혔다. 3명 미만 소규모 팀을 맡은 관리자를 중심으로 대거 감축했고, 상당수는 개별 기여자 역할로 전환됐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대기업의 "임원 슬리밍"과 닮아 있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구글은 사람을 줄이는 만큼 시스템과 도구를 채웠다. 더 큰 스팬(span)을 가진 리더에게 권한을 넘기는 대신, 데이터 기반 성과관리와 피드백 시스템으로 관리 공백을 메웠다. 한국식 구조조정에서는 이 부분이 자주 빠진다. 사람만 줄고, 공백은 그대로 남는다.
더 중요한 것은 구글 내부에서조차 "AI 효율화라는 구호 아래 지나치게 빠르게 구조를 바꿨다"는 비판이 나왔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이 비슷한 결정을 내릴 때, "구글도 줄였으니 우리도 줄이자"가 아니라 "구글이 어디까지 줄이고, 무엇을 남겼는지"까지 함께 봐야 한다. 중간관리자를 줄인다고 곧바로 민첩한 조직이 되지는 않는다. 한국식 위계 속에서 중간관리자는 단순한 결재라인이 아니라, 일선과 CEO 사이 정보와 심리의 완충 장치다. 이 완충이 사라진 자리에 AI 대시보드가 놓인다고 해서, 현장의 나쁜 소식이 위로 올라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침묵을 깨는 CEO의 4가지 질문
AI FOMO에 휘둘리는 CEO와 같은 환경에서도 성과를 내는 12%의 CEO를 가르는 건 기술력이 아니라 '질문의 수준'이다. 전자는 "우리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후자는 "우리는 무엇을 풀려는 것이냐"고 묻는다.
현명한 리더가 내부에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의 4가지다.
첫째, 우리가 AI로 풀려는 구체적 문제는 무엇인가? 매출 증대인지, 비용 절감인지, 고객경험 개선
또는 리스크 관리인지 말이다. 목표가 모호한 AI 투자는 대부분 파일럿의 무덤에서 끝난다.
둘째,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면 그 범위와 기준, 재교육과 직무 전환 기회를 어떻게 투명하게 공유하고 있는가? 직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감원 자체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음"일 것이다.
셋째, 재교육을 선택이 아니라 기본권으로 설계하고 있는가? 월 10시간의 AI·데이터 리터러시 교육을 의무화하고, 실패해도 괜찮은 사내 실험 공간을 열어두면 "구식이 될 것 같은 공포"는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뀐다.
넷째, 심리적 안전감을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관리하고 있는가? 월 1회 3문항 정도의 익명 설문이면 충분하다. 평균 3점 이하면 이미 경고등이 켜진 것이고, 이때 필요한 건 새로운 제도가 아니라 리더 자신의 행동 변화다. 회의에서 반대 의견을 먼저 구하고, 자신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침묵을 깨는 건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PwC 보고서는 최근 12개월 동안 신뢰 관련 문제를 경험한 기업이 66%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신뢰 리스크를 많이 겪은 상장사의 총주주수익률(TSR)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뚜렷이 낮았다. 신뢰는 평판이 아니라 숫자로 확인되는 재무 변수라는 뜻이다. 향후 12개월 매출 성장에 자신 있다고 답한 CEO는 30%에 그쳤다. 2022년 56%에서 5년 만의 최저치다. 역설은 여기 있다. 불안할수록 CEO는 더 빠르고 크게 의사결정한다. 장기 전략보다 단기 효율, 근본적 전환보다 보여주기식 선언이 앞선다.
2026년 AI 시대의 생존 조건은 역설적으로 기술보다 CEO의 정신 건강에 가깝다. "나는 다 알고 있다"는 환상을 내려놓고 "나는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함께 생각하자"는 태도로 돌아오는 것. 그 순간 조직의 침묵은 깨지고, AI가 대신할 수 없는 리더십이 시작된다. 오늘 회의실에서 "우리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이 나올 때, 한 번만 멈추고 물어보자. "무엇을 위해서?" 그 질문 하나가 조직을 구한다.
/김문경 국민대학교 겸임교수·대한리더십학회 부회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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