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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기의 불평등…기름 쓸어담던 나라만 사는 '정글의 법칙'

홍채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4.23 13:39

수정 2026.04.23 13:38

NYT "공급 감소보다 비축 수요가 가격 더 자극"
각국 '생존 모드'로…개도국 부담 가중
IMF 등 "과도한 비축 자제" 권고
호르무즈 해협 원유 수송.연합뉴스
호르무즈 해협 원유 수송.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이란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공급망 불안이 전세계적인 '사재기' 현상으로 번지면서, 글로벌 유가 불안을 키우고 국가 간 격차를 심화시킨다는 분석이 나왔다.

22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공급 차질에 대비해 원유 확보에 나서면서, 실제 공급 감소 이상의 가격 상승 압력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급 차질 우려에 따른 선제적 비축이 다시 시장 내 가용 물량을 줄이며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자기실현적'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자본력을 앞세운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 주요국은 에너지 물량을 선점하고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 특히 유럽 국가들은 항공유 확보를 위해 아시아 국가들보다 높은 입찰가를 제시하며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 역시 대규모 저장 시설을 활용해 비축량을 대폭 늘리는 추세다.

반면 구매력이 낮은 개발도상국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에너지 부담을 떠안고 있다. 자급률이 낮고 외환 보유고가 부족한 국가들은 연료 가격 상승과 수급 불안에 직면했다.

원유의 90%를 걸프만에서 수입하는 필리핀은 지난달 휘발유 가격 급등에 대응해 보조금 지급유류세 중단 등 비상조치를 시행했지만, 운전사들의 파업이 이어지는 등 불만이 이어지고 있다. 인도에서도 취사용 액화석유가스(LPG) 수급 불안 우려로 당국이 단속에 나서는 등 혼란을 겪고 있다. 태국 역시 자국 내 항공유 확보를 위해 수출을 일부 제한했으나, 이후 글로벌 유가 상승과 항공편 감소로 관광 산업에 부담이 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같은 현상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각국이 보호 장비 수출을 금지하고 백신 확보 경쟁을 벌였던 사례와 유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 매사추세츠대 이사벨라 웨버 교수는 현 상황을 "'정글의 법칙' 현장이 됐다"고 진단했고,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도 "각국이 생존모드에 돌입했다"고 평가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국제에너지기구(IEA) 등 국제기구들은 공동 성명을 내고 "각국의 에너지 비축 및 수출 금지 조치가 전세계적인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며, 이를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NYT는 "에너지 충격은 전세계적으로 유사하게 일어나고, 사재기는 어디서나 시장 가격을 상승시킨다"며 "그러나 어느 나라가 충분한 재고를 확보할 수 있는지는 불평등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제는 국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전제로 구축됐으나, 국가적 사재기가 시작되면 다시 국경이 중요해진다"며 글로벌 공조 체제의 붕괴를 경고했다.

whywani@fnnews.com 홍채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