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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열의 테크 오디세이] 64칸의 전장에서 패배한 인간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09 08:31

수정 2026.05.09 08:31

AI혁명의 시대, 사피엔스의 마지막 항해-7편

[파이낸셜뉴스] 1997년 5월 11일, 뉴욕 맨해튼 에퀴터블 센터. 창밖으로는 화려한 마천루가 빛나고 있었지만, 대국장 안의 공기는 차갑다 못해 얼어붙어 있었다. 그곳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체스 플레이어로 칭송받던 가리 카스파로프가 앉아 있었다. 22세에 세계 최정상에 오른 뒤 15년 동안 왕좌를 지킨, '인간 최고의 지능'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사람 대신 거대한 검은색 캐비닛 모양의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와 연결된 모니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초당 2억 번의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이 기계 앞에서 카스파로프의 얼굴은 게임 내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권하겠습니다."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깊은 고뇌에 빠진 카스파로프와 그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대한 슈퍼컴퓨터 딥블루. 1996년의 승리로 자신만만했던 챔피언은, 1년 뒤 생애 처음으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을 경험하게 된다.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깊은 고뇌에 빠진 카스파로프와 그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대한 슈퍼컴퓨터 딥블루. 1996년의 승리로 자신만만했던 챔피언은, 1년 뒤 생애 처음으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두 번의 만남이 있었다. 1996년 첫 대결에서 카스파로프는 4대 2로 승리하며 인간의 자존심을 지켰다. 대국 후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컴퓨터는 여전히 창의성이 부족하군요." 하지만 1년 뒤 다시 나타난 딥블루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IBM의 엔지니어들은 전설적인 체스 기사들의 기보 수백만 개를 입력했고, 카스파로프의 고유한 습관과 약점을 파고들도록 알고리즘을 다듬었다. 딥블루는 단순한 계산기를 넘어, 카스파로프라는 인류 대표 주자를 정밀하게 타격하기 위해 맞춤 설계된 저격수가 되어 있었다.

결정적인 장면은 2국에서 나왔다. 카스파로프는 기계의 약점을 노려 일부러 기물을 희생하며 유인책을 썼다. 그러나 딥블루는 무려 15분 동안 침묵을 지키다, 미끼를 무시한 채 장기적인 관점에서 숨통을 조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수를 두었다. 카스파로프는 경악했다. "이건 기계의 수가 아니야! 기계는 이렇게 뒤를 내다보는 인내를 가질 수 없어!" 그 15분은 인내의 시간이 아니었다. 미끼를 물었을 때 20수 뒤에 발생할 패배의 가능성을 연산하고 돌아오느라 걸린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카스파로프의 평정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 Deep Blue. Christina Xu. IBM의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의 실물이다. 2미터 높이의 이 투박하고 차가운 검은색 캐비닛 안에는 체스 연산만을 위해 특수 제작된 칩 수백 개가 탑재되어 있었다. 초당 2억 번의 수를 계산하는 이 ‘감정 없는 괴물’ 앞에서 인간의 직관과 자존심은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 Deep Blue. Christina Xu. IBM의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의 실물이다. 2미터 높이의 이 투박하고 차가운 검은색 캐비닛 안에는 체스 연산만을 위해 특수 제작된 칩 수백 개가 탑재되어 있었다. 초당 2억 번의 수를 계산하는 이 ‘감정 없는 괴물’ 앞에서 인간의 직관과 자존심은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6국,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면증을 안고 자리에 앉은 카스파로프는 평소라면 절대 두지 않았을 치명적인 악수를 두고 말았다. 딥블루는 단 19수 만에 킹을 외통수로 몰아넣었다. 대국이 끝나자 카스파로프는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눈가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좌절과 분노가 눈물로 맺혀 있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딥블루 쇼크'라는 이름으로 타전되었다. 하지만 패배 이후 카스파로프의 행보는 놀라웠다. 그는 기계를 원망하는 대신, 인간과 기계가 한 팀이 되어 대결하는 '어드밴스드 체스'를 제안했다. "기계의 계산 능력과 인간의 직관이 합해졌을 때, 우리는 신의 영역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오늘날 스마트폰의 무료 체스 앱조차 1997년의 딥블루보다 훨씬 강력하다.
이제 아무도 컴퓨터와 체스를 두어 이기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컴퓨터를 스승 삼아 수를 배운다.
카스파로프의 눈물은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고, 동시에 인류가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향해 처음 배를 띄운 출정식이기도 했다.

김도열 웹케시그룹 미디어전략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