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서울시립대 조익훈 교수·아주대 정재연 교수 공동 연구팀
암세포에만 흐르는 '발암 신호' 길목 차단해 정상 세포 부작용 해결
복잡한 당화 과정 역이용한 'PPO 전략'으로 간암 증식·전이 억제 확인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이 연구 성과는 앞으로 치료제가 마땅치 않았던 진행성 간암 환자들에게 부작용을 최소화한 맞춤형 항암제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이번에 개발된 'PPO 전략'은 간암뿐만 아니라 다양한 암종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표적으로 삼고 있어, 향후 여러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범용 항암 치료 플랫폼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암세포가 방어 체계를 해킹하는 방법: 'O-GlcNAc' 변형
우리 몸에는 암세포의 성장을 스스로 억제하는 'Hippo(히포) 신호'라는 방어 체계가 있다. 하지만 간암 세포는 이 방어막을 교묘하게 무력화한다. 서울시립대 조익훈 교수팀은 그 비밀이 'DKK1'이라는 단백질에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연구팀은 먼저 간암 환자 조직 67개를 분석했다. 정상 간 조직과 달리 간암 조직에서는 DKK1과 암 성장 촉진 인자인 YAP이 동시에 높게 나타났다. 두 수치는 서로 비례하며 함께 올라갔다. DKK1이 단순히 암에 반응해 나오는 물질이 아니라 암세포 성장을 직접 이끄는 주범임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연구팀은 이어 동물 실험을 진행했다. DKK1이 많이 만들어지는 간암 세포를 쥐에 이식해 종양을 만든 뒤, DKK1 억제제를 10일 동안 매일 먹였다. 결과는 명확했다. 억제제를 투여한 쥐에서 종양의 크기와 무게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렇다면 DKK1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암을 키울까. 연구팀은 DKK1이 암세포 내부로 신호를 보내 'LRP6'라는 수용체에 설탕 분자와 비슷한 'O-GlcNAc(오글렉낙)'을 갖다 붙인다는 것을 밝혀냈다. 마치 정교한 기계 장치에 이물질을 끼워 넣는 것과 같다. 이 변형이 일어나는 핵심 위치는 LRP6 단백질의 1466번째 아미노산(T1466)이다. 여기가 변형되면 암 억제 신호인 Hippo가 강제로 꺼지고, 암을 키우는 YAP 단백질이 활성화돼 암세포가 폭발적으로 증식한다.
■ "암세포만 들어와"… 정밀 타격의 핵심 'PPO 전략'
기존 억제제들은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 세포의 당화 과정까지 통째로 막아버려 독성이 강했다. 실제로 기존 범용 억제제를 세포에 적용하자 간암 세포는 물론 정상 세포까지 함께 타격을 받았다.
연구팀은 여기서 다른 길을 찾았다. 암세포는 정상 세포와 달리 세포막 근처에 'PIP3'라는 특정 성분이 유독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DKK1이 세포 안에서 연쇄 반응을 일으키면 세포막에 PIP3가 잔뜩 쌓인다. 이 PIP3가 OGT라는 효소를 세포막으로 끌어당겨 바로 옆의 LRP6를 변형시키는 것이 암 성장의 핵심 고리였다.
연구팀은 이 PIP3와 결합하는 성질을 가진 'PPO 도메인'을 일종의 유도 미사일처럼 활용했다. PPO가 암세포 세포막에 달라붙어 가림막 효과를 내면, OGT 효소가 길을 잃어 LRP6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 정상 세포는 PIP3 수치가 낮아 이 미사일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안전하게 보호된다.
■ 마비됐던 암 억제 신호,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PPO 전략의 효과는 실험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간암 세포에 PPO를 적용하자 LRP6 변형이 억제됐다. 마비됐던 Hippo 신호가 다시 살아나 암세포의 성장을 멈추게 했다. 암세포의 이동과 침투 능력도 현저히 떨어졌다. 장기 배양 실험에서도 암세포 덩어리의 수와 크기가 두드러지게 줄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선택성이다. PPO 전략을 간암 세포와 정상 세포에 동시에 적용했을 때, 간암 세포에서는 YAP 단백질이 크게 줄고 세포가 얼마나 빠르게 늘어나는지 보여주는 지표(Ki-67)도 확연히 감소했다. 반면 정상 세포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암세포만 골라 공격하는 정밀 타격이 실제로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조익훈 교수는 "암세포 특이적인 분자 기전을 이용했기에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며 "PPO 전략은 간암뿐 아니라 DKK1 발현 수치를 기반으로 한 환자 맞춤형 정밀 항암 치료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암 연구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캔서 커뮤니케이션즈(Cancer Communications)'에 게재됐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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