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언론학회 제78주년 4·3 학술 세미나 개최
AI·XR 기술 활용한 4·3 기억 재현 방안 논의
허호준·이완수·김대경 발제… 기록 윤리도 점검
세미나 앞서 제3회 4·3언론상 시상식 열려
KBS제주 '커밍 홈'·'경계인 미츠키' 대상 수상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제주4·3의 기억을 디지털 아카이브와 인공지능(AI)·확장현실(XR) 기술로 미래 세대에 전승하는 방안이 제주에서 논의됐다. 4·3의 기록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증언과 문서, 영상, 공간 정보를 연결해 다음 세대가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공 지식으로 바꾸는 과제가 핵심 의제로 다뤄졌다.
사단법인 제주언론학회(회장 정용복)는 지난 15일 제주4·3평화재단 1층 대강당에서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임문철),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집행위원장 강호진)와 함께 제78주년 제주4·3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 주제는 '기억은 어떻게 미래가 되는가: 제주4·3 디지털 아카이브와 기억의 재현'이다.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기록 보존과 활용, 미래 세대 전승, 디지털 기술의 윤리적 활용 문제가 함께 떠오른 데 따른 자리다.
정용복 제주언론학회 회장은 개회사에서 "기억은 저절로 미래가 되지 않는다"며 "이름을 부르고 자료를 찾고 증언을 듣고 기록을 남길 때 비로소 미래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인공지능이 기억을 대신할 수는 없고 XR이 고통을 대신 증언할 수도 없다"며 "디지털 아카이브는 세대와 세대가 만나고 지역과 세계가 대화하는 기억의 공론장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문철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환영사를 통해 "4·3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지 1년이 됐다"며 "기억은 보존에 머물지 않고 시대 변화에 맞춰 기록되고 전달되고 공유될 때 다음 세대의 기억이 된다"고 밝혔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축사에서 "제주4·3은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가 기억해야 할 보편의 역사로 자리잡고 있다"며 "제주4·3 기록물이 체계적으로 보존되고 활용될 수 있도록 제주4·3 아카이브 기록관 건립에도 속도를 내겠다"고 말했다.
이번 세미나는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4·3 기억 전승의 다음 과제를 묻는 자리로 마련됐다. 4·3은 국가폭력의 진실 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넘어 세계가 함께 기억해야 할 평화와 인권의 역사로 확장되고 있다. 문제는 기록을 어떻게 보존하고 연결하며 미래 세대가 접근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꿀 것인가다.
첫 발제는 허호준 리츠메이칸대학 객원연구원 겸 전 한겨레 선임기자가 맡았다. 허 연구원은 '나는 왜 제주4·3을 쓰는가: 4·3, 아카이브로 본 역사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30년 넘게 4·3을 취재하고 기록해 온 문제의식을 풀어냈다.
그는 4·3을 "한두 번 기사로 정리하고 지나갈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국가폭력과 침묵, 낙인, 국제 냉전 구조를 함께 묻는 역사라고 짚었다. 특히 기자의 역할을 추상적 해석보다 자료와 증언, 문서와 기록을 통해 진실의 편린을 찾아내는 일로 설명했다. 그의 발제는 지역 언론이 비극적 과거사 앞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자리였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완수 동서대학교 명예교수는 '과거 사건은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기억 이론의 새로운 접근방법을 통해'를 발표했다. 이 교수는 추모 기억을 개인적 기억과 집합적 기억으로 나눠 설명하며 제주4·3 희생자의 죽음이 개인과 공동체, 언론을 통해 어떻게 기억되고 재현되는지 분석할 수 있는 틀을 제시했다.
이 교수는 "기억이 진공 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봤다. 개인의 경험과 감정, 제도와 관행, 교육과 언론, 사회적 가치가 복합적으로 작동해 기억이 형성된다는 설명이다. 4·3처럼 국가폭력과 이념 갈등이 얽힌 사건에서는 어떤 이름으로 사건을 부르고 누구의 죽음을 어떻게 기록하는지가 공적 기억의 방향을 좌우한다.
세 번째 발제는 김대경 동아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가 맡았다. 김 교수는 '기억을 되살리다: AI·XR 기술로 구현하는 제주4·3의 디지털 기억관'을 주제로 AI와 XR을 결합한 4·3 디지털 아카이빙 플랫폼 모델을 제안했다.
김 교수는 기존 아카이브가 텍스트 중심의 보존과 열람에 머문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파편화된 4·3 사료를 지식 그래프로 연결하고 훼손되거나 사라진 역사 자료를 AI로 복원하며 유적지와 연계한 XR 기반 몰입형 역사 체험 콘텐츠를 개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지식 그래프는 인물과 장소, 사건, 문서를 서로 연결해 관계망으로 보여주는 기술이다. XR은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등을 포괄해 실제 공간과 디지털 정보를 결합하는 기술이다.
발제 이후에는 고호성 제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아 토론을 진행했다. 강홍균 제주한라대학교 겸임교수, 이재승 카카오 지역협력 리더, 고은경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팀장, 송진순 동아대학교 교수, 양동규 작가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토론에서는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의 가능성과 함께 윤리적 기준도 주요 쟁점으로 다뤄졌다. AI가 기록을 분류하고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역사적 고통을 과잉 재현하거나 상업적 콘텐츠로 소비하는 방식은 경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4·3 디지털 아카이브는 기술 전시가 아니라 진실 규명과 평화 교육, 유족과 공동체의 기억을 존중하는 공공 플랫폼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데 논의가 모였다.
세미나에 앞서 제3회 4·3언론상 시상식도 열렸다. 제주4·3평화재단, 한국기자협회, 제주언론학회가 공동 주최한 4·3언론상은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평화·인권·민주·정의의 가치 확산에 기여한 보도와 제작물을 발굴해 격년제로 시상하는 상이다.
올해 대상은 KBS제주 세대전승 다큐멘터리 2부 '커밍 홈'과 3부 '경계인 미츠키'가 받았다. 방송·영상 부문 본상은 제주MBC 다큐멘터리 '사죄의 완성', 신문·출판 부문 본상은 제주CBS '4·3추가진상조사 논란 단독 연속보도', 신인상은 제주대신문 특별기획 '재일제주인 MZ세대를 만나다'가 선정됐다. 대상에는 1000만원, 본상 각 500만원, 신인상 3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됐다.
KBS제주의 '커밍 홈'과 '경계인 미츠키'는 4·3의 기억이 가족과 공동체, 국경을 넘어 다음 세대로 어떻게 전승되는지를 추적한 작품이다. '커밍 홈'은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4·3 유족이 유해 발굴을 통해 76년 만에 희생자와 마주하는 과정을 담았고, '경계인 미츠키'는 재일동포 4세의 시선으로 직접 경험하지 않은 4·3의 기억이 가족의 언어와 침묵을 통해 전승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제주MBC '사죄의 완성'은 4·3 당시 형무소에 수감된 수형인들이 70여 년 뒤 재심을 통해 무죄를 입증해 가는 과정을 기록했다. 제주CBS의 연속보도는 22년 만에 추진된 4·3 추가진상조사 과정의 절차와 운영 문제를 짚었다. 제주대신문 특별기획은 재일제주인 3·4·5세대의 삶을 청년의 시선으로 조명했다.
이번 세미나와 시상식은 4·3 기억 전승의 두 축을 함께 보여줬다. 하나는 언론이 4·3의 진실을 기록하고 사회적 기억으로 확장하는 역할이다. 다른 하나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흩어진 기록을 연결하고 미래 세대가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제주언론학회는 이번 세미나를 계기로 4·3 연구와 저널리즘, 디지털 기술을 잇는 학술 공론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4·3 기록을 과거 자료로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과 연구, 전시와 체험, 국제 교류로 연결하는 작업이 다음 과제로 남았다.
제주4·3의 기억은 이제 지역의 상처를 넘어 세계의 기록이 됐다. 남은 과제는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더 조심스럽게 재현하며 더 넓게 공유하는 일이다. 이번 세미나는 4·3의 진실과 기억을 미래 세대의 언어로 옮기기 위한 출발점으로 의미를 남겼다.
jyb@fnnews.com 정용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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