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김도열의 테크 오디세이] 브리태니커의 몰락과 집단지성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23 07:00

수정 2026.05.23 07:00

AI혁명의 시대, 사피엔스의 마지막 항해-9편

[파이낸셜뉴스] 오랫동안 지식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가 아니었다. 특정한 자격을 갖춘 소수만이 생산하고 독점할 수 있는 성역(聖域)에 가까웠다. 그 질서의 정점에 있었던 것이 바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었다. 1768년 초판이 출간된 이후 브리태니커는 단순한 참고서가 아니라, 인류가 무엇을 '정확한 지식'으로 합의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집필진은 노벨상 수상자, 전직 국가 원수, 각 분야 최고 석학들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그 자체로 검증을 완료한 무결점의 정보로 받아 들여졌다.



검은 가죽 장정과 금박 제목으로 정렬된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전집.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된 지식’의 최종 형태를 상징했다.
검은 가죽 장정과 금박 제목으로 정렬된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전집.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된 지식’의 최종 형태를 상징했다.

1980년대 중반 한국 중산층 가정의 거실만 보아도 그 위상은 분명했다. 검은 가죽 장정에 금박 제목을 두른 백과사전 전집이 책장 중앙에 권위의 상징처럼 놓여 있었다. 실제로 얼마나 자주 펼쳐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지식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경계는 그토록 선명했다.

그러나 2001년 1월, 이 질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웹사이트가 등장한다. 지미 웨일스가 만든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백과'였다. 위키백과가 내건 슬로건은 단순했다.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장은 기존 지식 체계의 관점에서 보면 거의 도발에 가까웠다. 학위나 소속, 이력 같은 자격 증명 없이도 누구든 자신이 아는 내용을 쓸 수 있었고, 이미 쓰인 글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었다. 기존 학계와 언론은 즉각 우려를 표명했다.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쓰고 고치는 지식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
논쟁에 결론이 내려진 것은 2005년이었다.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 저널 '네이처'가 두 매체를 정면으로 비교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과학 관련 항목 42개를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교차 검증을 맡긴 결과, 브리태니커에서 123개, 위키백과에서 162개의 오류가 발견되었다. 위키백과의 오류가 더 많기는 했지만 네이처의 결론은 분명했다. 두 매체의 정확도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정확도 너머에 있었다. 바로 속도와 자정 작용이었다. 브리태니커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다음 개정판이 나올 때까지 수년을 기다려야 했다. 반면 위키백과는 오류가 발견되는 즉시 전 세계 사용자들이 참여해 수정했다.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당했을 때 이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위키백과는 즉각 내용을 최신화했지만, 브리태니커는 이미 오류가 되어버린 과거의 지식을 안고 상당 기간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백과사전 ‘위키백과’. 소수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던 지식 생산의 권력이 집단지성으로 이동하는 첫걸음이었다.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백과사전 ‘위키백과’. 소수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던 지식 생산의 권력이 집단지성으로 이동하는 첫걸음이었다.

결국 2012년, 브리태니커는 종이책 출판을 중단했다. 지식의 신뢰 기준은 '누가'에서 '어떻게'로 이동했다. 지식은 더 이상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검증과 수정이 반복되는 살아 움직이는 생태계가 됐다.

지금 우리는 AI가 만든 정보 앞에서 비슷한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다. 하지만 위키백과가 완벽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듯, AI도 완벽해야 신뢰받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오류를 검증하고 수정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느냐다.
브리태니커가 사라졌다고 인류가 무지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은 더 널리 퍼졌고, 더 빠르게 갱신되며, 더 많은 사람의 참여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지식은 이제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믿는다.

김도열 웹케시그룹 미디어전략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