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아빠, 저 사람들은 왜 먼저 들어가?"… 39도 끓는 애 안고 '1만원'에 굴복한 부모들 [얼마면 돼]

전상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24 09:00

수정 2026.05.24 11:01

열 펄펄 끓는 아이 안고 1시간 대기하는데, '유료 앱' 결제한 사람들은 프리패스하는 진료실 풍경.
가입자 1000만 명 돌파… 전국 소아과 5곳 중 1곳 종속된 민간 플랫폼의 위력
"의료는 공공 영역, 환자 접근성 차별 받아선 안 돼"
얌체 상술이라 욕하면서도, 결국 아이를 위해 '멤버십 구독' 버튼 누르고 마는 부모들의 마음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만든 이미지입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만든 이미지입니다

[파이낸셜뉴스] 토요일 아침 8시, 40대 직장인 K씨는 밤새 39도를 오르내리는 5살 딸아이를 안고 헐레벌떡 동네 소아과로 뛰었다. 진료 시작 30분 전인 8시 30분에 도착했지만, 간호사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청천벽력 같았다.

"아버님, 오전 현장 접수는 이미 마감됐습니다. 오후 진료로 대기하시겠어요?"

허탈하게 텅 빈 대기실 의자에 주저앉은 K씨의 눈앞으로, 9시가 가까워지자 여유롭게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부모와 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간호사에게 이름만 말하고 곧바로 진료실로 '하이패스'처럼 쑥쑥 들어갔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뛰지 않았다. 그저 집에서 모바일 예약 앱을 열고 '월 1000원'짜리 유료 멤버십 회원의 권리로 클릭 몇 번을 했을 뿐이다.

열에 들떠 칭얼거리는 아이의 이마를 짚으며, K씨는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건강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고도, 사기업이 만든 플랫폼에 돈을 내지 않으면 진료 순서조차 기약 없이 뒤로 밀려나는 세상. 가장 평등해야 할 아픈 아이들의 병원 대기석마저 철저한 '자본주의의 줄 세우기'에 잠식당하고 말았다.

◇ "돈 안 내면 무한 대기"… 소아과 21%가 종속된 플랫폼

현재 대한민국 양육자들의 스마트폰에 필수로 깔려 있다는 한 병원 진료 예약 앱의 누적 가입자 수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동안 무료로 환자들을 끌어모았던 이 앱은 최근 월 1000원(연 1만 원)의 유료 멤버십 제도를 도입했다. 돈을 내지 않으면 사실상 앱을 통한 예약 기능을 쓸 수 없게 막아버린 것이다.

문제는 이미 동네 병원들이 이 앱에 깊숙이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료계에 따르면 해당 앱에 가입한 의원급 의료기관은 전체의 11% 수준이지만, '오픈런'이 일상화된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그 비율이 무려 21.9%에 달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돈을 내고 앱으로 미리 접수한 환자들이 우선 처리되면서 현장 접수를 한 환자들은 2~3시간씩 대기하거나 아예 접수조차 하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일부 병원은 아예 현장 접수를 거부하고 100% 모바일 앱으로만 환자를 받기도 했다.

이에 보건복지부가 진료 예약 앱으로만 접수하고 현장 접수를 받지 않은 병원 8곳에 대해 '의료법상 진료 거부'에 해당할 수 있다며 부랴부랴 행정 지도를 내렸을 정도로, 현장의 쏠림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 "언제부터 환자가 병원 예약비를 냈습니까?"

전문가들은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보건의료용역이 철저하게 '비용'과 '디지털 접근성'에 의해 차별받는 현 상황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모 변호사는 "온라인 예약 외에 충분한 현장 접근성이 확보되지 못할 경우, 디지털 격차가 큰 조손가정이나 다문화가정 등의 의료 접근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게 된다"며 "어떠한 이유로든 환자들의 접근성은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장 역시 "디지털 소외계층이 배제되고, 민간에서 제공하는 유료 앱이 병원 진료 예약을 독점한다는 것은 대단히 기형적인 모습"이라며 "건강보험공단 등 공공기관이 주체가 되어 무상 예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근본적인 해소책이 필요하다"고 언론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환자의 예약을 받는 것은 본래 병원의 고유 업무인데, 왜 국가와 병원이 짊어져야 할 시스템의 붕괴 비용을 환자들이 사기업의 '구독료' 형태로 떠안아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 "1만원 아니라 10만원이라도 결제한다"... 욕하면서도 결국 '구독' 버튼을 누르는 아빠들


물론 1000원이라는 돈이 밥값을 굶을 만큼 큰 액수는 아니다. 맞벌이 부부들에게는 오랜 대기 시간을 줄여주는 눈물 나게 고마운 서비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40대 아빠들의 씁쓸함은 '금액'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필수 의료 인프라의 틈새를 사기업이 파고들어, 절박한 부모들의 심리를 인질 삼아 통행료를 걷고 있다는 기형적인 구조에 대한 분노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 금액이 설령 1만원이 아니라 10만원 이라도 그것을 그냥 결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0만원이라도, 100만원이라도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서 이를 감수할수밖에 없다.

분노는 짧고 현실은 길다. 오전 진료에 실패하고 오후 진료를 기다리기 위해 아픈 아이를 업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K씨는 속으로 '이런 얌체 같은 상술'이라며 핏대를 세우면서도, 결국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유료 멤버십 가입 버튼을 누르고 만다.

공공의료의 가치니, 자본주의의 병폐니 하는 거창한 담론은 가장에게 중요하지 않다. 당장 내일 아침, 불덩이 같은 내 아이가 차가운 병원 복도에서 2시간 넘게 방치되는 꼴을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픈 아이를 위해 아빠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법이 고작 '월 1000원짜리 유료 멤버십'을 쥐여주는 것뿐이라는 사실에 대한민국 3040 부모들의 주말은 한없이 서글프기만 하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