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분명하다. 올해 2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후 국제유가는 배럴당 95달러까지 치솟았고, 아시아 LNG 현물 가격도 급등했다. 필리핀은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일부 동남아 국가에서도 연료 수급 불안과 가격 급등 우려가 확산됐다. 아세안 원유 수입의 약 66%가 중동에 의존하는 만큼, 한국·일본·아세안 에너지 수입국들은 사실상 동일한 해상 에너지 공급망 안에 묶여 있다.
역내 에너지 협력에 대한 안건은 지난 5월 필리핀 세부에서 열린 제48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도 핵심 의제로 다뤄졌다. 아세안 정상들은 석유 공동 비축 가능성 연구를 아세안·동아시아경제연구소(ERIA)에 요청했고, 에너지·경제·외교 부처 간 위기 조정 프로토콜 구축도 논의했다. 그러나 이를 아세안으로 넓힐 경우 아세안 자체의 비축 역량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저장시설 상당수가 민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고, 공동 비축의 제도적 틀인 아세안 석유안보협정(APSA)도 아직 전 회원국 비준이 완료되지 않아 긴급 대응 체계로 공식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역외 국가 참여 없이 안정적인 공동 비축 체계를 구축하기에는 현실적 제약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지난 4월 100억 달러 규모의 '파워아시아' 구상을 출범시켰다. 동남아 국가들의 비축탱크 건설 지원, 에너지원 다변화, 공급망 안정 협력을 포함한 이 구상은 사실상 아세안을 포괄하는 역내 에너지 안전망의 초기 모델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인도·호주 등 주요 역내 국가들도 협력 의사를 밝힌 가운데,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참여가 구체화된 것도 의미 있는 진전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한국의 역할이다. 일본이 먼저 구상을 제시했다고 해서 한국이 단순 참여국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한국은 중동산 원유를 정제해 다시 동남아에 공급하는 아시아 정유 가치사슬의 핵심 허브다. 한국의 정유·석유화학 산업 역시 동남아 산업 공급망과 깊이 연결돼 있다. 동남아의 에너지 불안정은 한국 수출 공급망에 상당한 리스크 요인이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비축·수송·정제·공급망 정보를 연결하는 다층적 역내 에너지 협력 체계다. 한일 에너지 협력이 궁극적으로 아세안을 포괄하는 인도태평양 차원의 에너지 안전망으로 확장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민정 국립외교원 인도태평양연구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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