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제조, 범접 못하게 키우고
반도체 설계·파운드리 집중 육성
소재·부품·장비 생태계 전면 보강
반도체 산업 혁신 생태계 완성하고
선제적으로 AI 인프라를 확보할 때
전세계 벤처기업 한국으로 모일 것
거대언어모델(LLM)에 기반을 둔 AI 비서의 도래로 우리는 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며 새로운 문명에 적응하는 중이다. 머지않아 단순하고 반복적인 지식노동은 모두 AI의 몫이 될 것이며, 수많은 직종이 소멸하고 또 완전히 새로운 직종이 탄생할 것이다.
앞으로 6개월 혹은 1년 뒤에 또 어떤 기술적 도약이 우리를 놀라게 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제임스 와트의 개량된 증기기관이 인류를 고된 육체노동에서 해방시키고 산업혁명을 이끌었듯, AI의 도래는 인류가 누적해 온 모든 지혜를 즉각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제시하며 인간 고유의 지적 역량마저 대체하려 하고 있다. 고도로 발달한 인공초지능(ASI)과 공존해야 할 인류는 앞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인지, 우리는 AI와 어떤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할지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 모든 경이로운 문명사적 변화가 가능했던 기저에는 그래픽처리장치(GPU)라는 강력한 병렬 연산장치와 이를 뒷받침하는 초고속 고대역폭메모리(HBM)의 혁신이 있었다. AI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전 세계 빅테크 기업들의 과감하고 공격적인 인프라 투자 경쟁으로 GPU와 HBM은 이제 부르는 게 값이 된 상황이다. 현재 글로벌 기술 패권은 미국의 독보적인 칩 설계, 대만의 압도적인 파운드리(위탁생산) 제조, 그리고 한국의 세계 최고 수준 메모리 제조 역량이라는 '삼각 편대'가 이끌며 세계 산업의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꾸고 있다. 한국이 AI 반도체 생태계의 결정적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천재일우의 기회다. 아울러 치열한 기술 패권 경쟁과 글로벌 무역질서의 격변 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 오던 중국 반도체의 예봉을 꺾고 격차를 벌릴 수 있는 수년의 '골든타임'을 확보하게 된 것도 국가적으로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 귀중한 골든타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그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대체 불가한 초크포인트(Chokepoint)' 산업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우리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메모리 제조의 강점은 극한으로 끌어올리되,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되어 온 취약한 시스템 반도체 설계 역량과 파운드리, 그리고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전면적으로 보강해야 한다.
과거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소재와 장비를 적기에 아웃소싱하여 가격경쟁력 있는 반도체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기술 블록화가 심화된 현재는 철저히 전략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어느덧 반도체 산업은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핵심자산이 되었으며, 반도체 공급망 관리는 안보적 차원에서 철저히 기획되고 육성되어야 한다. 특히 국내의 척박한 환경에 놓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지원하여 거대한 혁신 생태계를 조성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AI 혁명은 이제 가상의 소프트웨어 공간을 넘어 제조 현장과 현실 세계를 직접 제어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머지않아 모든 산업 영역에 AI가 깊숙이 접목될 것이다. 제조업 강국인 한국은 생생한 제조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 내놓는 우리의 자동차, 휴머노이드, 선박, 항공우주, 스마트 팩토리, 방산제품 등 모든 제품은 최고급 제조 현장 데이터로 학습한 AI로 인해 근본적으로 차별화될 것이며, 그 혁신 제품의 핵심 두뇌에는 우리가 직접 설계하고 제조한 국산 AI 반도체가 탑재되는 가슴 벅찬 미래를 꿈꿔본다. 우리가 선제적으로 AI 인프라를 확보하고 반도체 산업 혁신 생태계를 완성할 때 전 세계의 훌륭한 젊은이들이 반도체 벤처기업을 창업하기 위해 기회의 땅 한국으로 앞다투어 찾아오는 역동적인 내일을 소망해 본다.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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