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화(Japanification), 차이나 쇼크(China Shock),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국가 이름과 경제학 용어가 결합한 말들이다.
대개 반가운 의미는 아니다. 경제가 겪은 실패나 부작용, 혹은 시장에 남긴 충격을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화는 장기 침체의 상징이 됐고, 차이나 쇼크는 제조업 충격의 대명사가 됐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우리 기업들이 제값을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적 저평가를 설명하는 말이다.
서양 국가 가운데는 네덜란드병(Dutch Disease)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말은 1959년 네덜란드 북해 흐로닝언에서 거대한 천연가스전이 발견되면서 탄생했다. 당시 가스전의 회수 가능 매장량은 2740억㎥로 유럽 최대 규모였다. 수년 만에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네덜란드산 천연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당시만 해도 이는 네덜란드가 다시 한번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올라설 기회처럼 보였다. 17세기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세계 무역과 금융을 지배했던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도 컸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천연가스는 네덜란드를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경제를 더 강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막대한 외화가 유입되며 화폐가치는 급등했고, 사람과 자본은 에너지 산업으로 몰렸다. 정책과 인력까지 한쪽으로 쏠리는 사이 제조업을 비롯한 다른 산업들은 경쟁력을 잃어갔다. 한 산업의 성공이 경제 전체의 다양성을 갉아먹은 것이다.
올해 한국 경제를 보면 이 단어가 떠오른다.
한국은 반도체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의 인공지능(AI) 투자 열풍 속에서 반도체 수출은 폭증하고 있다. 반도체에 힘입어 지난해 한국 수출은 사상 처음 7000억달러를 돌파했고, 올해는 9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달 들어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를 넘어섰다.
반도체 효과는 주식시장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실적개선 기대 속에 한때 꿈같이 여겨졌던 30만원, 200만원선을 각각 넘어섰다. 노무라증권은 목표주가로 각각 59만원, 400만원을 제시하기도 했다.
'6억원'에 달하는 반도체 기업들의 성과급 규모가 알려질 때마다 '이제는 공대가 의대보다 더 인기를 끌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돈과 인재가 가장 뜨거운 산업으로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문제는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다. 기업의 투자도, 청년들의 진로도, 국가 정책도 같은 곳으로만 흐르기 시작하면 다른 산업의 혁신역량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 수출은 역대 최대를 기록하고 있지만 내수경기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지금 한국의 반도체 호황을 네덜란드병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다. 네덜란드가 천연가스 호황에 경제 전체를 의존했던 것과 달리 한국은 자동차·조선·방산·화장품 등 여전히 경쟁력 있는 산업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병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는 분명하다. 한 산업이 지나치게 강해질 때 경제 전체를 그 산업의 성과로 착각하기 쉽다는 점이다.
지난 4월 산업활동동향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생산·소비·투자가 동시에 감소하는 '트리플 감소'가 8개월 만에 나타났다. 이 와중에 반도체 생산은 3.1% 증가했다.
반도체는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는데 경제 곳곳의 체감경기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호황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네덜란드도 가장 부유했을 때 자신들이 병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문제는 위기가 왔을 때가 아니다. 아무도 위기를 상상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kkskim@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