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닥터스·온병원 봉사단, 연해주 의료봉사 첫날의 기록
중국 훈춘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0시간의 여정
기후변화로 얼지않은 크라스키노강..역사·현실 교차한 국경
[파이낸셜뉴스] 국제의료봉사단체 그린닥터스재단과 온병원이 지난 4일 부산에서 '중국·러시아 역사문화 탐방 및 연추 의료봉사단' 발대식을 갖고 5일부터 10일까지 일정으로 극동러시아 의료봉사 대장정에 올랐다. 정근 의료총괄단장(안과), 외과 김석권 센터장, 가정의학과 정종훈 의료단장, 윤선희 의료부단장 등 의료진과 박명순 사무총장 등 그린닥터스 임원 18명으로 봉사단이 꾸려졌다. 선조들의 항일 독립운동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러시아 연해주 하산군과 크라스키노 일대를 찾아 고려인 동포들과 러시아 현지주민들을 상대로 해외 의료봉사에 들어갔다. 의료봉사단에 동행한 임종수 그린닥터스재단 공보이사가 현지에서 보내온 글을 싣는다. <편집자 주>
수많은 국경 중에서 이토록 깊은 역사적 무게를 지닌 곳이 또 있을까. 인도주의 의술을 펼치기 위해 길을 나선 한국인 의료봉사단체 '그린닥터스·온병원 봉사단' 18명이 마주한 연해주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해외 봉사'의 여정이 아니었다.
■ 낯선 환경과 인프라의 제약… 국경에서 마주한 현실
여정의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중국 연길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많은 양의 인도주의 의료봉사 물품에 대한 통관 절차가 길어지면서 수 시간을 대기해야 했다. 까다로운 절차 속에서 기다림이 길어지자 봉사단원들의 마음속에는 과거 척박한 환경 속에서 길을 개척해야 했던 독립군들의 험난한 여정이 자연스럽게 스치듯 지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절차를 마치고 중국 훈춘 세관(중화인민공화국 훈춘구안)에 도착해 국제버스에 몸을 실었다. 삼엄한 경계를 넘어 러시아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봉사단은 국경이 지닌 현실적인 제약을 체감했다. 중국 영내에서 매끄럽게 터지던 스마트폰의 로밍 데이터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서자 일시적으로 제한된 것이다. 현지 규정과 통신 환경에 따라 데이터 사용을 위해서는 일정 시간이 소요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국경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겪는 인프라의 차이가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현지의 열악한 에너지 상황도 현실로 다가왔다. 현지 식당의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인해 준비되던 식사가 중단되면서, 단원들은 손에 쥔 한국산 초코파이와 음료수로 급히 허기를 달래야 했다. 비를 피해 허름한 간이 천막 아래 모여 초코파이를 나누는 봉사단원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서로를 격려하는 따뜻한 온기만큼은 잃지 않았다.
■ 국경을 사이에 둔 두 풍경..도로가 보여주는 지역의 현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은 도로의 겉모습만으로도 양국의 서로 다른 개발 상황과 지역적 환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 측 국경 도시인 훈춘의 거리는 넓고 매끄러운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단원들의 눈길을 끈 것은 거리의 이름인 '발해대로(渤海大街)'였다. 우리 역사 속 발해의 흔적이 남아있는 현장을 지나며 반가움과 함께, 이 지역을 둘러싼 복잡한 역사적·지정학적 맥락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 국경을 넘어서자 풍경은 크게 바뀌었다. 도로 폭이 좁아지고 노면이 울퉁불퉁해 대형 버스가 크게 출렁거리기 일쑤였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 속에서 거칠게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단원들은 심한 차멀미와 싸우며 이동해야 했다.
이러한 국경 간 도로 환경의 극적인 대비는 물류와 동해 진출을 위해 국경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 중인 중국의 상황과, 상대적으로 인프라 투자가 늦어지고 있는 러시아 현지의 개발 격차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 기후변화의 경고, 그리고 독립군의 거친 숨결을 느끼다
버스가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현장이자 최재형·이범윤 선생이 항일 무장투쟁을 펼쳤던 역사의 땅, 크라스키노(Kraskino) 인근을 지날 때쯤 단원들은 기후변화의 현실을 직접 전해 들었다.
"이 지역의 크라스키노 강이 최근 겨울에도 전혀 얼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사과 농사가 이 일대에서 제법 수확을 올리고 당도도 높아졌지요."
지구온난화의 영향이 이 먼 북방의 관문마저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에 단원들은 환경 위기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동시에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단원들은 100년 전 이 길을 걸었던 선조들의 마음을 되새겼다. 매서운 칼바람과 굶주림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해주 황무지를 개척했던 독립군들.
봉사단의 정근 단장은 흐려진 창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소회를 전했다.
"최신식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우리도 10시간의 국경 넘기가 이렇게 고되고 힘겨운데, 아무것도 없던 그 시절 선조들이 걸었을 길은 얼마나 혹독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 "환경은 바뀌어도, 우리의 인도주의 정신은 멈추지 않는다"
그린닥터스와 온병원의 이번 연해주 방문은 '한국-러시아 의료 협력과 문화탐방'을 목적으로 대장정에 올랐다. 첫날 마주한 현실은 통관 대기, 통신 제한, 정전과 열악한 도로 상황 등 결코 만만치 않은 여정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세차게 쏟아지는 비 소식 때문에 첫날 예정됐던 본격적인 진료봉사 일정은 부득이하게 순서를 바꾸어 문화교류 일정으로 먼저 전환됐다.
하지만 봉사단의 인도주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100년 전 독립군들이 어떤 역경 속에서도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그린닥터스 봉사단 역시 궂은 날씨와 열악한 환경을 온몸으로 받아안으며 연해주 동포들과 현지 주민들을 향한 따뜻한 인술을 펼칠 채비를 마쳤다. 국경의 현실은 차갑고 혹독했지만 국경을 넘어 전해질 대한민국의 따뜻한 인류애는 이제 막 연해주의 푸른 대지 위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글·사진 = 임종수 그린닥터스재단 공보이사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