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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연해주 대지서 맞은 현충일..의술에 앞서 독립투사 '불꽃' 가슴에 새기다

노주섭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6.07 14:32

수정 2026.06.07 14:32

그린닥터스·온병원 러시아 의료봉사단, 이틀째 문화탐방
블라디보스토크서 크라스키노까지 5시간 30분 횡단열차
"독립투사 숨결 연해주서 공동체 향한 의사 소명 되찾아"

그린닥터스 제공
그린닥터스 제공


[파이낸셜뉴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 숲과 붉은 대지 위로 6월의 차가운 대륙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조국의 산천이 푸르름으로 짙어갈 무렵, 국경 너머 러시아 연해주 땅을 밟은 이들이 있다. 부산의 보건의료 NGO 그린닥터스와 온병원 합동 러시아 의료봉사단이다.

본격적인 의료봉사를 하루 앞둔 지난 6일, 봉사단원 18명의 눈빛은 여느 관광객들과 달랐다. 이날은 마침 제71회 현충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을 기리는 날, 봉사단은 화려한 도심 대신 우리 민족의 피와 눈물이 서린 항일 독립운동의 성궤를 따라 '문화탐방'이라는 이름의 엄숙한 여정에 올랐다.

의술로 사람을 치유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영혼과 소명을 먼저 치료하겠다는 다짐의 길이었다.

그린닥터스 제공
그린닥터스 제공


■ 신한촌 세 기둥 앞에서 흘린 눈물

봉사단의 이틀째 일정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점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시작됐다. 거대한 철길의 끝이자 시작점을 마주한 단원들은 곧장 한인 이주민들과 독립군들이 일구었던 항일의 메카, '신한촌(新韓村)'으로 향했다.

과거의 흔적은 사라지고 삭막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하바로프스카야 거리. 그 틈바구니 속 외롭게 서 있는 '신한촌 항일 독립운동 기념비' 앞에 봉사단 18명이 멈춰 섰다. 남과 북, 그리고 고려인 동포를 상징하는 세 개의 거대한 백색 석주(石柱) 앞에서 단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현충일 오전, 묵념이 시작되자 국경을 넘어온 바람 소리만이 적막을 깨웠다. 단원들은 차례로 준비해 온 꽃을 헌화하며 타국에서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추모했다. 이번 봉사에 합류한 국제종교연합 정여 이사장은 "교과서에서만 보던 신한촌에 서서 현충일 묵념을 올리니, 이 땅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처절한 외침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페치카' 최재형과 고려인 대부들 만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봉사단 버스는 북쪽으로 2시간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닿았다. 이곳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거상이었던 '페치카(난로)'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 숨결이 머문 고택이 있는 곳이다.

단층 목조 가옥으로 지어진 고택과 이어 방문한 '고려인 역사관'에서 봉사단은 시대를 고민했던 영웅들의 얼굴과 마주했다. 역사관 내에 상영되는 영상 속에서 안중근, 이상설, 이준, 이위종, 이동휘, 이범윤, 홍범도 등 일제의 총칼에 온몸으로 항거했던 독립투사들의 치열한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동포들을 먹여 살리고 안중근의 의거를 지원했으나 끝내 일본군의 총탄에 순국한 최재형, "독립을 보기 전엔 조국에 유해를 가져가지 말라"며 스노핀강(수이푼강)에 한 줌의 재로 뿌려진 이상설 열사의 이야기가 흐를 때, 전시실 안은 숙연함을 넘어 팽팽한 감동으로 가득 찼다. 우리가 일상의 안락함 속에 자주 잊고 지내던 '나라사랑'이라는 단어가 단원들의 가슴 깊숙이 문신처럼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린닥터스 제공
그린닥터스 제공


■ 5시간 30분 철길, 독립군 '오래된 미래' 공유하다

오후 늦은 시간, 봉사단은 사흘째부터 본격적인 인술(仁術)을 펼칠 국경 지대 크라스키노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동 수단으로 버스 대신 선택한 것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지선인 '바라놉스키-하산' 선의 침대칸이었다.

5시간 30분 동안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단원들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끝까지 밀려오는 광활한 대지와 숲은 과거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대륙을 호령했던 발해인들의 영토(염주성)였고, 100여 년 전 청년 독립군들이 낡은 총을 쥐고 칼바람을 맞으며 달렸던 전장이었다. 또한 1937년 고려인 동포들이 눈물을 흘리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던 비극의 철길이기도 했다.

좁은 침대칸에 모여 앉은 그린닥터스 단원들은 창밖의 광야를 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공유한 것은 독립투사들이 꿈꾸었던 '오래된 미래' 즉 억압받지 않고 굶주리지 않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선조들이 피로써 지켜낸 미래가 바로 지금 자신들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단원들은 모두 함께 나지막이 조국과 공동체를 향한 헌신을 다짐했다.

■ 마음을 치료한 의사들, 이제 국경을 치유하러 간다

그린닥터스 봉사단에게 러시아 땅에서 맞이한 이번 현충일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라는 거대한 거울 앞에 서서 의사로서, 보건의료인으로서 지녀야 할 인류애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되짚어보는 '마음의 치료' 과정이었다.

선조들의 핏자국과 숨결이 깃든 크라스키노에 도착한 봉사단은 이제 가방을 열고 청진기와 의약품을 꺼낸다. 고국을 떠나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고려인 후손들과 현지 주민들을 향해 펼쳐질 이들의 의술에는, 오늘 연해주 대지에서 배운 독립투사들의 뜨거운 '페치카' 정신이 고스란히 담길 것이다.


그린닥터스의 진짜 인술은 이미 그들의 마음이 치유된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글·사진 = 임종수 그린닥터스 공보이사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