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학 건강

[한동하의 본초여담] 오래된 병이라도 적절한 처방은 메아리처럼 빠르다

정명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6.13 06:00

수정 2026.06.13 06:00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아무리 명방(名方)이라 할지라도 체질에 맞지 않으면 효과도 나타나지 않고 부작용만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의원은 환자의 증상과 체질에 맞도록 적절한 처방을 해야 하는데, 적합한 처방이라면 제아무리 오래된 병증이라도 메아리처럼 빠른 효과가 나타난다. 챗GPT에 의한 AI생성 이미지.
아무리 명방(名方)이라 할지라도 체질에 맞지 않으면 효과도 나타나지 않고 부작용만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의원은 환자의 증상과 체질에 맞도록 적절한 처방을 해야 하는데, 적합한 처방이라면 제아무리 오래된 병증이라도 메아리처럼 빠른 효과가 나타난다. 챗GPT에 의한 AI생성 이미지.

옛날 한진사(韓進士)는 평소 아랫배 쪽에 통증이 있었다. 그는 아랫배에서부터 시작되어 마치 산증(疝症)과 비슷하게 점차 심해졌다. 산증은 아랫배, 서혜부(사타구니), 음낭, 고환 부위에 발생하는 당기고 아픈 통증을 통칭한다.

한진사는 평소 어설프게 의서를 공부한 한 유의(儒醫)와 친분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유의에게 자신의 증상을 말하자, 그 유의는 대충 보더니 "내가 한 번 처방을 내려봐도 좋겠소?"라고 했다. 한진사는 유의가 자신있는 듯하게 말하자 허락했다. 유의는 우공산(禹功散)에 망초와 대황을 넣어 대용량으로 처방해서 하루 두 번 복용하게 하였다.

우공산은 수습(水濕)을 몰아내고 대소변을 통하게 하는 매우 공격적인 처방인데, 여기에 심하게 설사를 시키는 망초와 대황을 추가로 넣은 것이다. 한진사는 이 처방을 복용하고서는 심하게 설사를 하고 기운이 끊어질 듯 혼미해져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한진사는 다른 의원에게 약 반 달 동안 몸을 보(補)하는 처방을 복용하고서야 조금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설사는 멎지 않았다.

한진사는 설사가 계속 되었지만 전에 유의의 잘못된 처방으로 설사가 나타났던 경험 때문에 다른 어떤 의원에게도 치료받기를 꺼리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렇게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한진사는 역병을 앓게 되었다. 윗배가 마치 배고픈 듯하면서도 배고프지 않고, 아픈 듯하면서도 아프지 않은 증상이 생겼으며, 설사도 더욱 괴로워졌다.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비로소 한 명의를 찾아 치료를 청하였다.

명의는 제자와 함께 한진사댁으로 왕진을 갔다. 명의가 진맥을 해 보니 맥은 침활(沈滑)했고, 복진을 해 보니 중완부위에 압통이 심하게 나타났다. 명의는 진찰을 마치고 나서 "제가 보기에는 담증(痰症)입니다. 가슴 속이 배고픈 듯 아픈 듯한 것은 담이 위의 입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며 이를 조잡(嘈雜)이라고 합니다. 또한 여러 해 동안 낫지 않은 설사 역시 담으로 인한 담설(痰泄)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제자가 아는 체를 했다. "스승님, 담병이라면 이진탕을 처방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했다. 명의는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별다른 대답이 없이 약방문을 써 내려갔다.

명의의 처방은 바로 만병이진탕(萬病二陳湯)이었다. 만병이진탕은 <동의보감>에 담설(痰泄)을 치료하는 처방으로 나온다. 만병이진탕은 담병의 명약인 이진탕(二陳湯)에 몇 가지 약재가 가미되어 담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 가지 병증에 두루 쓰는 처방이다.

한진사는 만병이진탕을 몇 첩 복용한 뒤부터 뚜렷한 효과가 나타났다. 대여섯 첩을 복용하자 거의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옆에서 지금까지의 치료과정을 지켜보던 제자가 명의에게 "스승님, 이처럼 오랫동안 고생한 병증이 이렇게 빠르게 좋아질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명의는 "무릇 병을 치료함에 있어 어려운 것은 처방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병증을 정확히 찾아내는 일이다. 비록 오래된 병이라도 적절한 약을 만나면 효과가 메아리처럼 빠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맞지 않는 약을 쓰면 공연히 위기(胃氣)만 손상시키고 도리어 병을 더 해칠 뿐이다."라고 했다.

사실 한진사는 원래부터 위약(胃弱)한 체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체질에 맞지 않는 우공산이나 대황, 망초를 복용하고 심한 설사를 할 것이다. 위가 냉하고 약한 체질은 기허증이나 담음병을 쉽게 앓는다. 그래서 만병이진탕과 같은 비위를 보하고 담음을 제거하는 처방이 적절했던 것이다. 위약한 체질은 어떤 병이라도 치료에 있어 함부로 설사를 시키면 안된다.

제 아무리 좋은 처방이라도 체질에 맞지 않으면 치료효과는 커녕,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의원된 자라면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역시만필(歷試漫筆)> 韓進士, 素有痰痛, 自小腹而起, 若疝漸, 一儒醫勸用禹功散, 入芒硝ㆍ大黃, 作大劑, 日再服, 則卽大泄而氣絶昏昏, 奄奄垂盡, 調補半月而少蘇, 自此之後, 有泄候者已六載, 而懲於醫治荏苒來兌矣, 又經厲患之後, 胸中似飢不飢, 似痛不痛, 泄候尤苦, 始過余請治, 余診之曰, 此症胸中之若飢若痛者, 痰在胃口, 而病名嘈雜, 且泄候之累年彌留者, 亦痰泄也, 使之用萬病二陳湯, 則服數貼後, 顯有效, 至五六貼, 諸症皆得快愈, 凡病不難乎處方, 惟難乎識症, 雖久病, 若得當劑, 效捷應響, 若不得當劑, 徒損胃氣, 反又害之. (한 진사는 평소 담으로 인한 통증이 있었는데, 아랫배에서부터 시작되어 마치 탈장과 비슷한 증상이 점차 심해졌다. 어느 선비 출신 의원이 우공산에 망초와 대황을 넣어 많은 양으로 처방하면서 하루 두 번 복용하게 하였다. 그러자 곧 심한 설사를 하며 기운이 끊어질 듯 혼미해져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반 달 동안 몸을 보하는 치료를 받고서야 조금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설사 증상이 생긴 지 이미 6년이 되었고, 의원의 치료로 큰 화를 입은 경험 때문에 치료받기를 꺼리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전염병을 앓고 난 뒤에는 가슴 속이 마치 배고픈 듯하면서도 배고프지 않고, 아픈 듯하면서도 아프지 않은 증상이 생겼으며, 설사도 더욱 괴로워졌다. 이에 비로소 나를 찾아와 치료를 청하였다. 내가 진찰하고 말하였다. "이 증상에서 가슴 속이 배고픈 듯 아픈 듯한 것은 담이 위의 입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며, 병명으로는 조잡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해 동안 낫지 않은 설사 역시 담으로 인한 설사이다." 그래서 만병이진탕을 쓰게 하였더니 몇 첩 복용한 뒤부터 뚜렷한 효과가 나타났다. 다섯∼여섯 첩에 이르러서는 여러 증상이 모두 시원하게 나았다.
무릇 병을 치료함에 있어 어려운 것은 처방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병증을 정확히 알아내는 일이다. 비록 오래된 병이라도 적절한 약을 만나면 효과가 메아리처럼 빠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맞지 않는 약을 쓰면 공연히 위의 기운만 손상시키고 도리어 병을 더 해칠 뿐이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