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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천지는 하늘이 품었지만, 폭포는 우리에게 왔다"

노주섭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6.10 10:18

수정 2026.06.10 10:18

그린닥터스·온병원, 등정 대신 장백폭포서 영산 기운 느껴
세계지질공원·생물권보호구 품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
천지 대신 쏟아지는 '하늘의 물줄기' 앞에서 발길 돌려

그린닥터스 제공
그린닥터스 제공


[파이낸셜뉴스] "비는 이미 다 내렸으니 내일이면 길이 열리고 백두산 천지를 보게 될 겁니다."
지난 8일 저녁,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떠나 도착한 중국 연길 시내 숙소. 신요안 신부의 장담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린닥터스·온병원 의료봉사단 18명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인술을 펼친 뒤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를 눈에 담기 위해 길림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버킷리스트에 넣는 그곳. 그린닥터스의 러시아봉사단 18명 또한 평화통일의 염원을 안고 백두산 천지 도전에 나섰다. 천지에서 불교-기독교-천주교 연대모임인 국제종교연합 정여 이사장을 비롯해 기독교 임영문 목사, 천주교 신요안 신부, 불교 정오스님, 정근 장로는 종교와 인종, 국가를 초월해 종교간 화합을 도모하듯 백두산 천지에서 "사자평(사랑과 자비로 평화를)"을 외치면서 남북화해와 평화를 기원하기로 계획을 짜고 백두산 길에 올랐다.



해마다 천지가 얼굴을 드러내는 날은 평균 50여 일에 불과하다는 까다로운 기상 조건에도, 이들은 '이번만큼은' 하는 기대를 접지 못했다.

그러나 이튿날 오전,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밤사이 정상에 눈이 내려 입산이 전면 금지된 것이다. '천지는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이 이렇게 뼈아플 줄이야.

그린닥터스 제공
그린닥터스 제공


■ 천지를 품은 하늘 대신, 우리에게 내려온 장백폭포

봉사단은 좌절할 틈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천지 대신 그 물이 처음으로 세상과 만나는 곳, 장백폭포로 향했다. 비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비룡폭포'라 불리는 이곳. 해발 2000m, 절벽 높이 약 68미터, 폭 약 70m 규모의 이 폭포는 천지의 유일한 출구인 승사하 계곡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초당 약 2.15톤의 물이 절벽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굉음은 마치 산을 울리는 북소리 같았다.

이번 그린닥터스 봉사단에 동행한 국제종교연합 정여 이사장(대한불교 조계종 금정총림 방장스님)은 "천지는 하늘이 품어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 물줄기가 이렇게 우리 앞으로 내려왔다"라며 "차가운 물보라를 맞으며 백두산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 45만 년 화산의 살아있는 교과서, 장백폭포 지질학적 가치

봉사단이 선 절벽은 단순한 암석 덩어리가 아니었다. 백두산은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Global Geopark)으로 지정됐으며, 특히 장백폭포 주변은 45만 년에 걸친 화산 활동의 기록을 가장 선명하게 간직한 '지질명소'다.

절벽 곳곳에서는 현무암, 조면암, 흑요석질류문암 등 다양한 화산암의 층리가 관찰된다. 이는 수차례의 분화와 용암류의 중첩, 단층 운동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다.

또 폭포수가 절벽 바닥을 침식하며 폭포의 위치가 조금씩 '후퇴'하는 현상은 백두산이 현재 진행형인 지형 변화를 보여주는 드문 사례다. 현지 안내원은 "장백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화산호에서 떨어지는 폭포라는 희소성까지 갖췄다"고 설명했다.

그린닥터스 제공
그린닥터스 제공


■ 생물다양성의 보고, 그리고 뜨거운 온천

발아래로는 폭포의 물줄기가 송화강의 발원지로 흘러간다. 바로 이 물줄기가 동북아시아의 젖줄이 되어 먼 일본해까지 닿는다는 사실에 그린닥터스 봉사단원들은 숙연해졌다. 특히 종교간 화합을 통해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국제종교연합 회장단은 모든 강물이 바다에서 만나듯, 세상의 갈등도 평화의 바다에서 융화하기를 바랐다.

장백폭포 주변으로는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취룡온천군이 펼쳐졌다. 수온 82℃에 달하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그 자리에서 봉사단원들은 직접 삶은 온천 계란을 맛보며 '백두산의 열기'를 느꼈다.

이 일대는 1980년 유네스코 국제생물권보호구로 지정된 생물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고도별 수직 분포 덕분에 2277종의 식물과 1225종의 동물이 공존한다. 표범, 호랑이, 반달가슴곰 등 멸종위기종은 물론 인삼과 산사해당 같은 희귀 식물도 이곳에서 자란다.

봉사단원들은 "천지를 보지 못한 아쉬움은 컸지만 이곳의 숨 쉬는 생태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입을 모았다.

■ 국경과 이념 넘은 인술, 그리고 민족의 영산

그린닥터스와 부산 온병원은 지난 5일부터 6일간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일대에서 현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와 의약품을 지원했다. 특히 2017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치료를 포기했던 고려인 3세 문 류드밀라(60대) 씨의 자택을 재방문해 건강을 살피며 남다른 인연을 이어갔다.

정근 그린닥터스 이사장은 "고통받는 이웃을 치유하는 인술 앞에는 국경도 이념도 장벽이 될 수 없다"며 "비록 이번에는 천지의 맑은 물을 눈에 담지는 못했지만, 그 물이 쏟아지는 폭포 앞에서 백두산이 우리에게 보내는 기운을 충분히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근 이사장은 이번 그린닥터스 '러시아 의료봉사단'의 여정을 봉사단과 한마음으로 후원해준 부산은행과 신한은행에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천지를 보지 못한 아쉬움은 컸다.
하지만 그 물줄기가 곧 폭포가 되어 내리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백두산이 흘려보낸 뜨거운 생명력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정상에는 만년설과 칼바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폭포 아래, 그들의 마음만은 뜨거웠다.

글·사진 = 임종수 그린닥터스 공보이사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