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특파원 칼럼] 미국 생활 10개월 斷想

이병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이병철 뉴욕특파원
이병철 뉴욕특파원

미국에 온 지 10개월. 오기 전 떠오르는 이미지는 철저한 자본주의, 약육강식의 사회, 살아남은 사람이 승자, 각자도생의 나라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시간은 몇 가지 경험을 통해 이런 단편적인 인식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몇 달 전 아이가 심하게 아픈 적이 있었다. 동네 병원을 찾았지만 의료진은 곧바로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보라고 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응급실 문을 들어섰다. 의료진은 곧바로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했고, 담당의사는 두세 차례 병실을 찾아 아이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사이 간호사들은 수시로 다가와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부모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었고, 집으로 돌아가 약을 복용하면서 몇 차례 외래 진료를 받으면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제야 잔뜩 움츠러들었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미국 병원비가 살인적이라는 이야기를 이미 들어왔기에 걱정이 됐다. 병원 직원이 다가와 "의료보험은 무엇을 가지고 계세요"라고 물었다. 병원 측은 의료보험 상황을 확인한 뒤 최종 비용은 추후 안내하겠다며 일단 귀가를 권했다. 3일 후 전화가 왔다. 응급실 비용이 7000달러(약 1000만원)에 달한다는 안내였다. 그러면서 최종 비용을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떨리는 손으로 병원에서 온 우편물을 열어봤다. 최종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금액은 700달러였다. 90%가 삭감된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가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미국과는 매우 달랐다.

또 다른 경험도 있다. 미국에 정착한 지 30년이 넘은 한인 이민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한 교민에게 물었다. "미국 사람들은 자녀가 성인이 되면 독립시키고 더 이상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한국 이민자들도 그렇게 하나요." 질문을 던진 순간,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반응이었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면 독립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결혼할 때도 부모가 특별히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집을 마련하는 일도, 결혼비용을 감당하는 일도 자녀 스스로의 몫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녀들 역시 부모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본인 인생인데 당연히 자기가 책임져야지요." 돌아온 대답은 짧았지만 단호했다. 비슷한 경험은 또 있었다.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자녀를 둔 한인 이민자를 만난 적이 있다. 미국에서도 의사는 대표적인 고소득 전문직이다. 게다가 의사가 되는 과정은 한국 못지않게 치열하다. 문득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자녀가 의사가 돼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부모가 은퇴한 뒤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하나요." 이번에도 반응은 같았다. 질문 자체를 낯설어했다.

미국이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다만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있다. 미국은 개인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만큼 국가와 공동체 역시 가족이 감당해야 할 부담의 상당 부분을 함께 나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의 독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녀 역시 부모의 노후를 인생의 의무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인의 독립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 시스템 위에서 가능해진다. 이런 사회 시스템은 아이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미국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진로를 고민한다. 대학 진학 자체보다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에 더 집중한다. 인턴십과 봉사활동, 아르바이트 경험을 쌓으며 사회 진출을 준비한다. 독립이 당연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의 삶도 달라진다. 자녀를 끝까지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이 적다 보니 노년을 보다 주체적으로 보낸다. 여행을 다니고, 운동을 하며, 소일거리를 찾는다. 자녀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한국에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늙고, 자녀는 부모를 위해 지친다. 미국 10개월이 내게 묻는다. 그 헌신이 서로를 위한 것이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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