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칼럼일반

[강남視角] 퍼스트 펭귄은 어디서 태어나나

파이낸셜뉴스
조창원 논설위원
조창원 논설위원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은 혁신과 리더십을 상징한다. 범고래와 표범물범이 서식하는 차디찬 바다 앞에서 펭귄 무리는 망설인다. 저 바닷속으로 뛰어들어야 먹고살 수 있지만, 그 순간 포식자들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 그때 한 마리가 먼저 몸을 던진다. 퍼스트 펭귄의 용기가 나머지 무리를 움직인다. 경영학은 이 장면에 홀딱 반했다. 스타트업 투자자들은 '퍼스트 펭귄상'을 만들었고, 기업들은 "우리 회사의 퍼스트 펭귄을 찾습니다"라는 채용공고를 냈다. 2010년대 혁신의 열풍 속에서 퍼스트 펭귄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이 비유는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퍼스트 펭귄은 가장 먼저 잡아먹힐 수도 있다. '혁신의 선구자'라는 찬사에 떠밀려 실패의 짐을 혼자 짊어진다. 조직이 퍼스트 펭귄에게 명운을 맡긴 채 결과만 기다린다면, 그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희생양 고르기에 가깝다. 혁신을 독려하면서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조직에서 퍼스트 펭귄의 신화는 잔혹사에 가깝다.

퍼스트 펭귄은 아무 조직이나 사회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그를 키우고 배려하고 누군가 희생하는 건강한 생태계에서만 퍼스트 펭귄이 등장하는 법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생태계의 주인공은 '황제'라는 이름의 실재하는 펭귄이다.

황제펭귄의 생존 비결은 '허들링(Huddling)'이다. 영하 50도 남극의 혹한 속에서 수천마리가 거대한 원형 대열을 이룬다. 바깥쪽 펭귄이 칼바람을 몸으로 막으면, 안쪽 펭귄들은 체온을 회복한다. 온기를 되찾은 안쪽 펭귄이 다시 바깥으로 나가 동료를 지킨다. 그리고 그 허들링 안에서, 수컷들은 발등 위에 알을 올린 채 두 달을 굶으며 버틴다. 알이 얼음 바닥에 닿는 순간 단 몇 초 만에 생명은 끝난다. 그 알을 지키려고 무리 전체가 필사적으로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 혹한이 끝날 즈음, 알에서 새 생명이 깨어난다. 훗날 바다에 가장 먼저 뛰어들 퍼스트 펭귄의 탄생이다.

허들링은 아름다운 이야기도 지혜로운 선택도 아니다. 그렇게 안 하면 다 죽기 때문에 그냥 하는 행위다. 수백만년에 걸쳐 극한의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생태적 본능이다. 이러한 펭귄의 생태 본능은 우리 사회와 빼닮았다. 위기를 돌파하는 영웅 즉 퍼스트 펭귄이 등장하는가 하면, 공동체가 똘똘 뭉쳐 국난을 극복하는 허들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퍼스트 펭귄은 허들링이라는 환경 속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회를 이끌 유능한 리더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허들링 환경은 어떤가.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에다 민주주의 선도국가라는 자부심. 우리는 그 박수 소리에 취해 경계심이 느슨해졌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계엄 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두 개의 나라처럼 쪼개졌다. 같은 팩트를 보고도 정반대로 이해하고 적대시한다. 고질적인 세대·지역·젠더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서로의 급소에 감정의 날을 겨냥하는 등 더 깊이 곪아가고 있다. 서로를 위해 차가운 외풍을 막아주기보다 내부적으로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며 사분오열한다. '역(逆)허들링'의 광풍이 부는 것 아닌가 싶다.

황제펭귄은 바깥의 찬바람보다 내부 분열이 더 치명적이라는 점을 본능으로 안다. 원형 대열 가운데 한 곳이라도 무너지는 순간, 혹한은 그 틈을 파고들어 공동체를 전멸시킨다. 공동체를 이끌 패기 있고 건강한 리더는 시기와 질투로 분열된 공동체에서 나올 수 없다. 이것이 펭귄 생태계가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다.

'갈등 공화국'의 특징은 사람들 스스로 고립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역허들링 문화를 바로잡는 변화는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삶에 지쳤다면 먼저 자신을 한번 꼬옥 안아주자. 그리고 옆자리의 동료를, 혹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누군가를 꼬옥 껴안아 보자. 황제펭귄이 수백만년 동안 그래왔듯이, 그 작은 온기 하나가 대열을 되살린다.

jjack3@fnnews.com 조창원 논설위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