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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첨단산업 생명줄, 전력시장 개방하라

파이낸셜뉴스

공기업이 독점 전력 판매시스템
민간사업자 참여할 수 있게 개방
소비자 다양한 요금·서비스 혜택
독립적인 전력 규제기관 설립해
정치권 '전기요금 외풍'서 보호
도매시장 극심한 변동성도 제어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인공지능(AI)이 거대언어모델(LLM)을 거쳐 AI 에이전트(Agentic AI)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한 AI는 사이버 공간을 벗어나 제조, 모빌리티, 휴머노이드 등 물리적 세계로 융합되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로 발전하고 있다. 강력한 제조업 경쟁력을 갖춘 대한민국은 이러한 피지컬 AI 흐름을 적극 활용해 대체 불가한 제조업 강국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한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이 계획하고 있는 기가와트(GW)급 AI 데이터센터 구축은 다가올 대한민국의 미래 100년을 위한 담대한 투자다. 첨단산업의 성패는 이제 데이터나 알고리즘의 우위를 넘어 거대한 연산장치를 뒷받침할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격한 첨단산업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반도체 팹(Fab) 증설 역시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한 곳에만 대형 원자력발전소 15기 규모인 15.4GW의 전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에너지를 실어 나를 송전망 구축사업의 절반 이상이 인허가와 지역갈등에 가로막혀 지연되면서 대한민국 전력 인프라는 심각한 동맥경화를 앓고 있다.

이러한 인프라 마비 현상의 이면에는 한국 전력시장이 안고 있는 오랜 구조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단일 공기업이 송전·배전·판매를 모두 독점하고 있으며, 전력 요금은 시장의 수요·공급 원리가 아닌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되고 있다.

원가를 밑도는 경직된 요금체계 탓에 발생한 천문학적인 누적 적자는 국가안보와 직결된 필수전력망 확충에 대한 투자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더욱 뼈아픈 문제는 '가격신호(Price Signal)'의 상실이다. 요금이 고정되어 있다 보니 소비자와 기업이 전력 사용을 효율화하거나 피크시간대를 피하도록 유도할 경제적 유인이 시장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는 전력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송전망(Transmission) 구축은 국가안보 및 초격차 산업기술 보호와 직결되므로 공공이 주도하여 패스트트랙으로 확충해야 한다. 한편 전기가 최종 소비자에게 흐르는 모세혈관인 배전(Distribution)과 소매 판매(Retail) 부문은 과감하게 민간에 개방하여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과거 국가가 독점하던 무선통신 시장을 과감히 민간에 개방하여 경쟁체제를 도입한 결과 이용자에게 어떤 편익이 제공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전력시장의 경쟁체제 도입 필요성은 자명하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이미 소매시장의 자유화로 이동한 지 오래다. 일본은 2016년 전면 자유화 이후 통신·가스·정보기술(IT) 등 다양한 분야에서 700여개의 신전력사업자가 등장했다. 시장이 열리면서 통신비 결합할인, 전기차 충전 요금제, 100% 무탄소 에너지 요금제 등 소비자의 선택권이 폭넓게 보장되었다. 미국의 텍사스주나 영국 역시 다원화된 요금체계를 통해 소비자가 직접 공급자를 선택하는 유연한 시장을 구축했다. 나아가 소매 경쟁은 단순한 요금 인하 수단이 아니다. 분산된 에너지를 모으는 가상발전소(VPP), 수요반응(DR), 스마트 전력제어 등 새로운 에너지 혁신 생태계를 창출하는 강력한 마중물이다.

물론 시장개방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안전장치가 있다. 바로 '독립적인 전력 규제기관' 설립이다. 현재 국회에는 독립적인 전력시장 감독기구로 '전력감독원'을 신설하는 내용의 전기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어 있다. 금융시장의 금융감독원과 유사하게 전력시장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기구는 합리적인 원가주의에 기반해 정치권의 외풍으로부터 전기요금을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한다. 전력시장의 공정성 감시, 전력망 안정성 감독, 원가검증, 분쟁조정 등을 전담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도매시장 가격의 극심한 변동성을 제어하고, 독점적 망 이용의 공정성을 엄격히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국가가 주도하는 단일 공급 시스템으로는 폭발적이고 다양한 미래 산업의 에너지 수요를 결코 감당할 수 없다. 규제기관의 독립화와 소매시장 개방은 지속적 산업발전과 에너지 대전환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동전의 양면이다. 국가 생존과 기술패권이 걸린 전력 인프라 혁신을 위해 정부와 국회의 초당적이고 실용적인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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