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視角] 가오슝의 시간
대만이 세계 인공지능(AI)의 심장이 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엔비디아 창업주 젠슨 황이다. 2년 전 타이베이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이 말을 했다. 황이 지목한 AI 심장의 근거지를 추적해 들어가면 파운드리 업체 TSMC의 남부 기지 가오슝(팹 22)의 2나노 초미세공정이 나올 것이다.
변방의 가오슝은 굴곡진 대만의 근현대사가 관통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동남아 진출을 위한 남진정책 전초기지로 삼았던 장소가 여기였다. 가난한 항구는 근대적 무역항으로 개발된다. 태평양전쟁 기간엔 거대한 중화학 군수기지로 거듭난다. 실질적 번영기는 전쟁이 끝나고 찾아왔다. 대형 정유공장과 철강사, 조선소, 석유화학 단지가 빼곡히 들어서 대만 경제 엔진의 중추가 됐다.
도시가 쇠락의 길을 간 것은 본토 중국이 깨어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다. 값싼 인건비를 쫓아 제조공장들이 줄줄이 중국으로 거점을 옮겼다. 자국 안보 방패를 반도체에서 찾았던 대만 정부는 북부 중심으로 대규모 과학단지를 조성하며 산업 재편을 밀어붙인다.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수석부사장 출신 모리스 창이 정부의 파격적인 제안으로 북부 신주에 정착, TSMC 철옹성을 쌓기 시작한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가오슝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하나둘 짐을 쌌다. 남은 것은 낡은 공장과 오염투성이 부지였다.
추락하던 가오슝을 일으켜 세운 것이 AI 혁명의 물결이라는 사실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북부의 TSMC는 모바일과 AI 급변기를 거치며 남하를 시작해 타이중에서 7나노, 타이난에서 5나노, 3나노 설비를 들여 팹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대만 반도체 지도의 남방 한계선은 거기까지였다. 가오슝 이름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차량용 반도체 공급대란이 일던 2021년이다. TSMC가 다급하게 범용 신규 공장을 물색하고 있을 때 본사에 들이닥친 이가 1년 전 보궐선거로 당선된 의사 출신 천치마이 가오슝 시장이다.
그의 손엔 오염된 채로 버려진 가오슝 정유공장의 도면이 들려 있었다. 통상 10년이 걸리는 토양 정화사업을 단 2년 만에 끝낼 것이며, 이 땅을 비롯해 물·전기·인허가 전체를 100% 시 정부가 책임지겠다며 전현직 경영진을 만나 유례없는 기업 유치전을 펼친다. 시 내부에 이미 TSMC 전담팀을 꾸린 상태였다. 팀은 밤을 새워가며 타임테이블 간격을 줄이고 지원항목을 늘렸다. 중앙정부와 대만전력공사의 강력한 후방 협력을 끌어낸 것도 물론이다.
시큰둥하던 TSMC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외국인 주주가 다수인 이사회가 마라톤회의를 열고 가오슝 투자안을 결국 승인했다. 가오슝 기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생성형 AI 혁명이 세계를 휩쓸던 2023년 말 가오슝의 기존 공정은 2나노 팹으로 승격된다. 당초 TSMC가 낙점했던 북부의 2나노 예정지가 주민들 반대로 무산되자 천치마이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물과 전기 요구량이 4배 이상 폭증하는 초유의 인프라 청구서 해결책을 먼저 내놨다. 세계 AI 공급망의 심장 2나노 팹은 2024년 가오슝에서 이렇게 완성됐다.
정치가 이 과정에서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고 보는 건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대만 민주화의 중요 분수령인 된 1979년 민중 봉기의 발상지가 여기다. 집권 여당 민진당의 영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가오슝의 유치전에 중앙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대신 최종 선택권은 전적으로 TSMC가 쥐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새겨볼 대목이다.
가오슝의 시간은 이제 한국 반도체가 넘어야 할 중대 관문이 됐다. 필요한 모든 선결조건을 패키지로 완결 짓는 행정 시간이 칩 패권의 시작이다. 우리 정부와 지자체가 사생결단의 각오로 해내야 하는 일이 바로 이 시간과의 싸움이다. 물, 전기, 사람, 교통, 교육, 주거 그리고 환경단체 설득까지. '닥치고 인프라' 해결이 먼저다. 나머지는 기업에 맡기시라. 조건이 성사되면 기업은 번개처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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