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김도열의 테크 오디세이] 'AI 그림' 우승 사건과 예술의 경계

임수빈 기자
파이낸셜뉴스

AI혁명의 시대, 사피엔스의 마지막 항해-16편

[파이낸셜뉴스] 2022년 가을,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장. 디지털 아트 부문 1위 수상작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 발표되던 순간, 객석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환호는 즉각 터지지 않았고, 박수는 어색하게 흩어졌다. 르네상스 회화를 연상시키는 웅장한 구도, 대리석 기둥 사이로 쏟아지는 빛, 벨벳처럼 매끄러운 드레스의 질감.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완결된 서사와 공간을 품은 하나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AI를 통해서만 제작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붓질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질감과 조형은 오히려 지나칠만큼 매끄럽고 정제되어 있다. 이 작품은 "누가 그렸는가"라는 질문 이전에, "이것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미술계에 던지며, 21세기 예술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AI를 통해서만 제작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붓질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질감과 조형은 오히려 지나칠만큼 매끄럽고 정제되어 있다. 이 작품은 "누가 그렸는가"라는 질문 이전에, "이것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미술계에 던지며, 21세기 예술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시상대에 오른 우승자 제이슨 앨런의 입에서 나온 한 문장이 그 합의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단 한 번도 붓을 들지 않았으며, 생성형 인공지능 '미드저니'에 900회가 넘는 텍스트 프롬프트를 입력해 얻은 결과물이라고 밝혔다. 그 순간, 미술관의 공기에 균열이 일었다. "이건 예술이 아니다." "기계가 만든 이미지를 창작이라 부를 수는 없다." '예술의 죽음'이라는 문장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이 풍경은 낯설지 않다. 19세기 중반, 사진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화가들은 캔버스 앞에서 "기계가 인간의 영혼을 훔쳐 간다"며 분노했다. 그때도 예술은 끝났다고 탄식했다. 그럼에도 사진은 회화를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회화를 '정확히 기록하는 의무'에서 해방시켰고, 그 해방은 인상주의와 추상주의라는 전례 없는 도약으로 이어졌다. 기술은 예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되묻게 했을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얼마나 힘들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통제했는가'였다. 예술사는 이미 비슷한 질문과 마주한 적이 있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남성용 소변기를 전시장에 올려놓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아무것도 직접 만들지 않았다. 다만 선택했고, 맥락을 바꾸었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 선택 하나가 예술의 무게중심을 '손재주'에서 '사유'로 옮겨놓았다. 이후 앤디 워홀은 실크스크린을 직접 찍지 않았고, 데미안 허스트는 손으로 나비를 붙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예술의 중심축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떻게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1495-1498).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원근법과 인물의 심리를 극적으로 포착한 걸작이다. 한때 회화는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재현하는 기술이자 기록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사진이 등장하면서, 사물을 '정확하게 그리는 일'은 더 이상 화가만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회화는 모방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과 감정, 추상과 실험의 세계로 과감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1495-1498).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원근법과 인물의 심리를 극적으로 포착한 걸작이다. 한때 회화는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재현하는 기술이자 기록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사진이 등장하면서, 사물을 '정확하게 그리는 일'은 더 이상 화가만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회화는 모방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과 감정, 추상과 실험의 세계로 과감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불과 3년, AI 이미지의 발전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900번의 프롬프트로 겨우 한 장을 건지던 시대는 이미 옛말이 되었다. 오늘날 챗GPT의 이미지 생성 기능은 채팅창에 "이렇게 바꿔줘"라고 말하듯 그림을 수정하고, 구글의 '나노바나나'는 4K 해상도의 사진 같은 이미지를 몇 초 만에 뽑아낸다. 최신 모델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스스로 '생각'하며 구도를 계획하고 결과물을 검증하기까지 한다.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기능이 공개된 첫 주에만 7억 장의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정도다. 이제 수십 년의 훈련 없이는 불가능했던 인체 묘사와 명암 표현이, 문장 한 줄로 구현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론 그림자도 짙다. 미드저니와 스테이블 디퓨전은 창작자의 동의 없이 수억 장의 이미지를 학습했다는 이유로 집단소송에 휘말렸고, 디즈니와 유니버설 스튜디오까지 소송에 가세했다. '누구의 화풍인가', '누가 원작자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세계 곳곳의 법정에서 다투어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예술의 종말이 아니라 창작 환경의 변화라는 사실이다. 기술이 더 이상 창작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 시대, 예술가는 비로소 '표현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사유의 깊이'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 그리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깊이 상상하고 얼마나 탁월한 선택을 하는가다. 현대의 창작자는 캔버스 앞에서 홀로 고통받는 장인이 아니다. 가능성의 홍수 속에서 의미 있는 하나를 건져 올리는 큐레이터이며, 감각과 메시지를 설계하는 디렉터다. 붓은 더 이상 손에 있지 않다. 붓은 사고의 방향에 있다.

김도열 웹케시그룹 미디어전략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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