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약서를 타고 온다. 가정법원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혼전계약의 모든 것"[부장판사 출신 김태형 변호사의 '알쏭달쏭 이혼]
왜 요즘 혼전계약에 열광할까
가정법원에서 수천 건의 이혼 사건을 처리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 전에 미리 약속을 해둘 걸"이다. "내가 왜 내 특유재산을 나눠줘야 하느냐"며 혼인 자체를 주저하는 젊은 세대부터 재산분할 과정에서 갈등이 폭발하는 재혼 부부까지 혼전계약은 더 이상 '부자들만의 장난감'이 아니다. 실제로 한 결혼정보회사의 설문조사에서 예비부부의 70% 이상이 "혼전계약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는 '재산분할에 대한 욕심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 '이혼에 대비해 자신의 고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가 주로 꼽혔다. 미국식 프리넙에 호감을 갖는 젊은 부부들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이혼율이 높은 현실에서 "사랑은 사랑대로, 재산은 재산대로" 별도 관리하겠다는 인식 변화가 분명히 느껴진다.
트럼프식 프리넙과 한국식 혼전계약
외국 사례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이 바로 오늘날 미국식 프리넙을 상징하는 '도널드 트럼프'다. 그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혼전계약서를 점점 더 치밀하게 '업그레이드'했고, 심지어 "이혼 후 본인을 소재로 한 인터뷰·책 등 출판 금지 조항"까지 넣어 '프리넙의 제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발상을 적용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혼전계약이 실제로 작성되었다. "혼인 중 외도 적발 시 상대방에게 위자료 3억 원을 지급한다. 결혼 전 취득한 A아파트와 B주식은 이혼 시 상대 배우자에게 분할하지 않는다. 각자 부모로부터 증여받은 재산은 어떤 상황에서도 각자의 특유재산으로 본다." 우리 법원은 이런 약정 전부를 기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누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어떤 재산이 누구 소유인지'를 판단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한다.
한국에서 혼전계약은 유효한가?
결론은 "원칙적으로 유효"하다. 민법은 사적 자치의 원칙을 인정하기 때문에 강행규정이나 공서양속에 반하지 않는 이상 당사자 사이의 계약은 언제든 자유롭게 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민법 제829조는 혼인 전 부부재산약정을 명시적으로 허용하고 있고, 부동산 등 일부 재산에 관해 약정을 공증·등기까지 하면 제3자에게도 효력이 미친다. 다만 많은 분들이 "혼전계약은 다 무효다"라고 오해하게 된 계기는 "협의 또는 심판에 의해 구체화되지 않은 재산분할청구권을 혼인 해소 전에 미리 포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본 대법원 판례 때문이다. 즉, 이혼 후에야 비로소 발생하는 재산분할청구권을 이혼 전도 아니고 결혼 전에 포기한다는 조항은 그대로 통용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혼전계약 전체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관리·운용할지'에 대한 약정은 민법과 판례가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인정하고 있다. 혼전계약에 들어가는 조항은 대략 네 가지 형태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 재산의 귀속·관리에 관한 조항이다. "결혼 후에도 각자 명의 재산은 원칙적으로 각자 소유로 한다. 부부 공동으로 취득한 주택은 7:3으로 지분을 나눈다." 등이다. 이런 조항들은 재산관계를 명확히 한다는 측면에서 법적으로 존중될 여지가 크다. 두 번째로 이혼 시 재산분할 비율에 관한 조항이다. "이혼 시 재산분할은 일률적으로 3:7로 한다. 배우자는 A회사 지분에 대해서는 재산분할청구를 하지 않는다." 판례는 이러한 조항들이 '재산분할청구권 자체의 사전 포기'에 해당한다고 보아 이를 허용하진 않지만 구체적인 분할 방식·비율을 미리 정해두었다면 재판 과정에서 중요한 참고자료로 참작되는 경향은 있다. 세 번째로 생활 방식·가사 분담에 관한 약정이다. "설날엔 친정부터, 추석엔 시댁부터 방문한다. 집안일은 맞벌이를 감안하여 5:5로 분담한다." 이런 약정은 실제 강제집행의 대상이 될 수는 없지만 이혼소송에서 '혼인 파탄 책임'을 판단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재판에서 "당사자들이 합의한 생활 원칙을 어느 쪽이 반복적으로 위반했는지"를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덕적·인격적 약속이다. "폭언을 하면 매회 100만 원씩 지급한다. 외도를 하면 다툼 없이 합의이혼에 응한다." 등이다. 이런 조항들 중 일부는 민법 제103조(선량한 풍속·사회질서 위반)에 의해 무효가 될 수 있지만 일부는 혼인 파탄 책임을 평가하는 중요한 자료로 쓰일 수 있다. 특히 양육권·면접교섭권 사전 포기 약정 등은 전형적으로 무효가 되는 약정이다.
실제로 있었던 흥미로운 사례들
사례 1: "바람 피우면 재산 포기"
실제 사건에서, A씨는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혼인 중 폭력·외도 없이 성실하게 생활하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남편이 반복적으로 이를 위반한 뒤 이혼소송이 제기되자 법원은 각서와 사실관계 전체를 종합해 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고 보았고 상당액의 위자료를 인정했다. 비슷하게 "외도를 하면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혼전계약·각서도 그 조항 자체를 그대로 집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재판상 이혼에서 귀책사유를 강하게 인정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실제로 이러한 약정은 재산분할, 위자료 액수에 직접·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례 2: 장모가 강요한 혼전계약의 역풍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한 사례에서는 장모가 예비사위를 상대로 "딸에게 폭언·폭행을 하면 거액의 위약금을 지급한다"는 혼전계약서를 강요했다. 남편은 부담을 느끼면서도 결혼을 위해 그 계약서에 서명했지만 이후 갈등 과정에서 이 문서가 계속해서 '무기'처럼 사용되면서 오히려 혼인관계가 급속히 파탄 나게 되었다. 법률적으로는 강요·협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가 가능하고, 지나치게 일방적·불공정한 약정은 공서양속 위반으로 무효가 될 수 있다.
사례 3: "설날엔 친정 먼저"는 왜 안 통하나?
어느 예비부부는 다음과 같은 혼전계약을 체결했다. "설날에는 친정부터, 추석에는 시댁부터 먼저 방문한다. 결혼 전 모은 비상금은 각자 개별 계좌로 따로 관리한다."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것은 후자의 '비상금 관리'에 관한 약정이다. 이는 민법 제829조에 따른 부부재산약정으로 인정될 여지가 크다. 반면 명절 방문 순서와 같은 생활 방식 조항은 '강제이행'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위반 시 바로 손해배상을 명할 수 있는 성격의 조항도 아니다. 다만, 이혼 재판에서 상대방의 반복적인 약속 위반이 혼인 파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다.
잘 만든 혼전계약이 가져오는 효과
혼전계약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충분한 순기능을 갖는다.
기대치의 명료화
"나는 이 정도 가사 분담을 기대했고 이런 재정 운영을 원했다"는 내용을 문서로 공유하는 순간 많은 막연한 오해가 사라진다.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란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공동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에 있어 '사업계획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혼전계약'이다.
갈등 발생 시 신속한 정리
재산관계가 분명히 정리되어 있으면 이혼을 결심했을 때 길고 소모적인 분쟁을 줄일 수 있다. 그 계약 내용이 재판에서 전면적으로 관철되지는 않더라도 어떤 재산이 누구의 특유재산인지, 누가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어 절차를 단축시킬 수 있다.
관계 유지에도 도움이 됨
역설적으로 혼전계약은 이혼을 쉽게 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싸움이 커지기 전에 감정과 재산을 분리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분쟁 시 도망갈 출구가 아닌 서로의 책임과 경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
맺으며
가사소년전문법관, 가정법원 부장판사, 그리고 현재 이혼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체감한 실무 팁을 정리하면 이렇다.
'각서'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계약서로 만들 것
서명·날인, 날짜, 당사자 인적 사항을 명확히 기재하고 가능하면 공증까지 받아두는 것이 좋다. 공증된 부부재산약정은 나중에 "억지로 쓰게 했다"는 주장을 상당 부분 차단해 준다.
일방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내용은 피할 것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식의 극단적인 조항은 공서양속 위반으로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폭력·외도 등 인격권 침해에 대한 예외 없이 '봐주기' 조항을 넣는 것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양쪽이 각자 변호사에게 상담받고 체결할 것
양측이 독립적인 법률 자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 계약의 공정성을 입증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장모·장인 주도'처럼 제3자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계약은 분쟁의 씨앗이 될 뿐이다.
'법적 효력'과 '증거 가치'를 구분해서 생각할 것
모든 조항이 집행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 많은 조항들이 이혼 재판에서 귀책사유·혼인 파탄 경위 등을 판단하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설령 강제이행이 어려운 내용이라도 분쟁 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법은 결국 세상을 따라온다
현재 판례는 여전히 "재산분할청구권은 이혼이 성립한 때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 이전에 미리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혼인제도에 대한 인식이 급변하고 있고 다른 나라에서 부부재산약정의 주요 대상에 '이혼 시 재산분할 방식'을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우리 법제가 언젠가는 보다 적극적으로 혼전계약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 현장에서 젊은 부부들을 만나보면 "미국식 프리넙 제도에 찬성한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법과 판례는 결국 아주 천천히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우리가 할 일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필수 문서'로서의 혼전계약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l 김태형 변호사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이다. 2007년 법관 임용후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17년간의 법관생활을 끝내고 법무법인 바른에 합류했다. 김태형 변호사는 법관시절 2012년부터 총 8년간 가사∙상속 및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법관 퇴직 전 5년(2019~2024)간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가사∙상속 관련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했다. 베스트셀러인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상속, 이혼, 소년심판 그리고 법원"(박영사, 2023)의 저자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