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시녀·정권 충견' 오명 쓴 채… 檢, 칼 접다 [논설실의 뉴스 진단]
10월 2일 검찰청 폐지·공소청 출범
1948년 8월 정권수립 직전때 간판
1954년 9월 검찰에 수사권을 부여
檢·警 각각 수사권 갖고 '힘 겨루기'
제1공화국 몰락 이후 警 위상 격하
제5공화국때 중수·공안부 힘 '막강'
검찰, 살아있는 권력에의 굴종
역대정권들, 집권도구로 검찰 활용
전임정권 보복수사 주체로 변질돼
최고층과 결탁, 무소불위 권력 행사
특검 도입·검찰개혁·중수부 폐지 등
수사·기소권 비대화 견제 목소리 커져
'영욕의 78년' 검찰, 역사 속으로
朴정권땐 검·경 모두 권력 하수인
범죄와의 전쟁 등 거악척결 공헌도
검찰청이 공소청으로 바뀜에 따라 78년 검찰 역사가 오는 10월 종지부를 찍게 됐다.
검찰 조직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 직전 검찰청법이 제정되면서 출범했다. 수사를 총괄하고 기소 독점권을 가진 최고 국가 법 집행기관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검찰 조직을 역대 정권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 검찰은 '권력의 시녀' '정권의 충견'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보완수사권이라는 마지막 문제가 남아 있지만 오는 10월 2일이면 검찰청은 폐지되고, 기소권만 가진 공소청으로 간판이 바뀐다.
검찰의 수사권은 1948년 제정된 검찰청법에 근거가 마련돼 정부 수립 때부터 보장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임명한 초대 검찰총장은 권승렬이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처럼 독립운동가 변론 항일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이 대통령의 불기소 지시에도 독직 사건에 연루된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기소했다. 당시 수사를 맡은 서울지검장은 최대교였다.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과정에서 검찰 수사권을 놓고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경찰에 독자적인 수사권을 주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반대도 많았다. 검찰 출신 엄상섭 의원과 한격만 검찰총장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당시 엄 의원은 "우리나라는 경찰이 중앙집권제로 돼 있는데, 경찰에다가 수사권을 전적으로 맡기면 경찰 '파쇼'라는 것이 나오지 않나. 검찰 파쇼보다는 경찰 파쇼의 경향이 더 세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러면서 "범죄 수사의 주도권은 검찰이 가지는 게 좋지만, 장래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도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한 총장은 "이론적으로 말하면 수사는 경찰에 맡기고, 검사에게는 기소권만 주는 것은 법리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앞으로 100년 후면 모르지만 (지금은) 검사에게 수사권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결국 국회는 검찰에 수사권을 부여하기로 하고 1954년 9월 23일 형사소송법을 통과시켰다. 초기 입법 과정을 보면 국회는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는 대원칙에는 공감하면서도 검경 권력균형을 고려해 검찰에 수사권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광복 후의 경찰 권력은 지금보다 더 막강했다. 식민지 강압통치의 도구였던 일제 경찰의 그림자가 이승만 정부에도 드리워 있었고, 국민들의 인식도 나빴다. '파쇼'는 강압적 권력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검찰 파쇼도 그렇지만 경찰 파쇼를 더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그런 정치역학적 배경에서 수사권을 확보한 검찰은 경찰과 서로 견제하면서 수사·기소권을 동시에 행사했다. 검찰과 경찰은 각각의 수사권을 갖고 힘 겨루기를 벌였다. 최고 권력은 두 기관을 권력유지에 활용했다. 특히 경찰은 치안유지라는 본래의 목적 외에 대공·대야당 문제에 이용당했다. 정권과 야합한 경찰 권력도 기세등등했다.
경찰의 위상이 격하된 것은 제1공화국 몰락 이후다. 3·15 부정선거에 관여한 경찰이 정권의 하수인이 되는 것을 막고자 제2공화국 헌법은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명문화했다. 1961년 영장청구권을 검사의 권한으로 한정했는데, 이는 경찰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검찰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보다는 역시 검경의 균형과 상호 견제를 염두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 문제는 그 이후의 개헌으로 흐지부지됐다.
혹자는 박정희 정권이 검찰을 활용하려고 검찰권을 강화했다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최고 권력자 입장에서 보면 검찰이나 경찰이나 다 같은 존재다. 박정희 시대에 경찰은 당시 내무부 내 조직이었다. 검경의 어느 한쪽에만 힘을 실어줄 이유도 없었다. 검찰이나 경찰이나 권력의 하수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고 권력자를 부모로 둔 형제지간이었을 뿐이다. 다만 검찰의 힘이 점차 세져서 주눅이 든 경찰은 수사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날을 염원하고 있었다.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라는 개혁 덕분에 드디어 경찰은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경찰이 최고 권력과의 유착 관계가 덜하고 상대적으로 중립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경찰의 중립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1960년대 초에 시도했다가 무산된 경찰의 중립화는 6·29선언 직후인 1988년에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당시 여야가 합의하여 경찰의 중립성 보장방안을 확정했고, 이에 따라 내무부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독립했다. 경찰청장은 경찰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내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경찰청은 내무부의 외청 형태로 완전한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나 형식적으로나 현재의 경찰을 중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찰위원회도 허울 좋은 빈껍데기 조직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는 행정안전부에 경찰국을 설치해 경찰 통제를 강화했다. 이재명 정부는 경찰국을 폐지했지만 경찰의 독립성이 강화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검찰 권력이 어떻게, 언제부터 경찰을 누르고 이렇게 비대해진 것일까. 제3·4공화국 박정희 시대에는 권력기관으로서의 검찰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 정보기관들의 권력이 훨씬 강했다. 굵직한 대공·학생 시위 등 공안 사건은 이들 두 기관이 주도적으로 수사하고 검찰은 보완수사와 기소만 담당하는 정도였다. 검찰에 힘이 실린 것은 5공화국 때였다. 그 중심에 대검 중앙수사부가 있다. 물론 공안사건만 맡는 공안부도 따로 있었다.
대검 중앙수사부의 뿌리는 광복 후 제정된 검찰청법에 들어 있는 대검 중앙수사국이다. 중요한 범죄를 수사·지휘·감독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실제 발족된 것은 1961년 4월이었다. 1973년 1월 특별수사부로 이름이 바뀌어 정권이나 검찰총장 하명 사건을 전담했다. 전두환 정권은 기존 권력조직을 활용하면서 한편으로 검찰의 권한을 키워줬다. 초임 검사의 직급을 고위공무원인 3급으로 높이는 등 전체 검사의 직급을 상향 조정한 것은 1981년이다. 법원조직법과의 균형을 맞춘다는 취지로 검찰총장, 고등검사장, 검사장, 고등검찰관, 검찰관이라는 직급을 만들었다.
중앙수사국도 중앙수사부로 개명해 청와대나 검찰총장의 하명 사건을 본격적으로 맡아 수사하기 시작했다.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명성사건 등 굵직한 비리 사건을 파헤쳤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검찰총장 임기제를 도입하는 등 중립을 보장하는 듯했지만 검찰의 위상과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5공 비리사건, 수서사건, 율곡사업 비리사건, 12·12 쿠데타 수사,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한보 사태 등을 처리하며 검찰은 절정기를 구가했다.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회자됐다.
이런 사건들을 볼 때 사실 거대비리 척결에 검찰이 공헌한 점도 무시하지 못한다. 일견 검찰은 정의로운 보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성역 없는 수사'를 강조하며 검찰은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조직폭력배와 마약 범죄자들을 처단하면서 민생과 치안에 힘을 쏟는 최고 수사기관의 모습도 과시했다.
검찰의 문제는 살아 있는 권력에의 굴종이었다. 전임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보복수사의 주체를 자임했다. 그러면서 현재 권력의 부패와 비리에는 눈감았다. 가령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연관된 BBK 수사를 해보지도 않고 면죄부를 줬다. 전현직 대통령의 자녀나 측근 비리 수사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한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여겨졌다. 5공 비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 사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 사건이 그렇다.
검찰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며 공안정국을 조성, 정권유지를 위한 직할 친위부대 역할을 자처했다. 정치적 하명 사건 수사는 으레 검찰의 몫이었다. 조폐공사 파업 유도 논란이나 '옷 로비' 사건도 그런 유형이다. 표적수사, 정치검찰의 비난이 쏟아졌다. 검찰 내부의 항명 파동도 있었다. 1999년 초 전별금 사건으로 사퇴 압력을 받은 심재륜 당시 대구고검장은 "검찰을 정치권력의 시녀로 만든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숨긴 채 후배 검사들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며 수뇌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최고 권력과 결탁한 검찰권에는 무소불위, 안하무인의 수식어가 붙었다.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에는 가혹행위를 포함한 불법적인 수사 방식을 동원했다. 이른바 짜맞추기 수사, 별건 수사, 먼지떨이식 수사가 그런 것이다.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수사에서도 서슬 퍼런 검찰의 위세는 다르지 않았다. 일반사건 피의자를 상대로 한 물고문 사건이 터져 검찰총장이 옷을 벗는 일도 있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가진 검찰권의 비대화에 대한 견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별검사 제도가 도입됐고, 검찰 개혁과 중수부 폐지 요구가 거세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으로 이어진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대검 중수부 폐지의 결정적 도화선이 됐다. 2013년 4월 직접수사권을 가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현판을 내렸다. 중수부장은 모두 31명이 재직했는데 초대는 이종남, 마지막은 김경수였다.
검찰의 중립성은 어느 정권이나 강조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검찰을 적폐수사의 본산으로 활용했고, 검찰 조직을 친정권화했다. 검사들도 중심을 잃고 이념에 의해 분열돼 정권의 변화에 따라 부화뇌동을 일삼았다.
경찰 또한 검찰과 더불어 정권유지에 일조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주체는 경찰이다. 경찰은 시국 사건 등의 수사에서 검찰의 하부조직이나 같았다. 경찰이 잘해서 수사권을 일임해 독립시켜 주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검찰이 사라져도 경찰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는 한 경찰은 제2의 검찰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거기에다 보완수사권까지 박탈하면 경찰이 검찰을 대체하는 공룡 조직이 될 수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설치돼 있지만 발족 6년 동안 아무 성과가 없다.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 산하에 설립된다. 독립된 조직이 아니므로 정권의 영향권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대검 중앙수사부의 하명 수사를 얼마든지 시킬 수 있다.
검찰권이 비대해진 것은 역대 정권이 독립과 중립을 보장하지 않고 집권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여 경찰에 넘겨준들 정권 입맛대로 경찰을 부리면 수사·기소 기능 분리라는 검찰개혁은 의미를 상실한다. 그래도 검찰은 막강한 수사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표적수사를 했다고 해도 거악 척결에 공헌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과연 경찰이 검찰만 한 능력을 보여주며 거대비리를 단속할 수 있을지 의문부호는 여전히 남는다.
[email protected] 손성진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