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포럼

[포럼] 아니라고 말하는 디자인

파이낸셜뉴스
김현선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김현선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사유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한마디를 오래도록 마음에 담으며 살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을 끊임없이 질문했다. 너무 쉽게 "그렇다"고 말하는 순간, 생각은 멈춘다. 반대로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질문이 시작되고, 질문은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우리는 지금 '예'가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약속한다. 정치도, 경제도, 도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현실보다 기대를 먼저 팔고, 과정보다 결과를 먼저 보여준다. 화려한 말일수록 박수를 받는다.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시공사들의 수주 경쟁을 보면 눈부신 조감도와 파격적인 설계가 먼저 등장한다. 심의를 통과하기 어려운 계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제안하고 보자는 경쟁이 반복된다. 당선이 우선이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환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실현할 수 없는 설계였음이 드러난다. 허가조차 어려운 계획이 수정과 축소를 거듭하고, 사업은 지연된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용자의 몫이 된다. 그럼에도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조차 없다. "시간만 준다면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안 넘어가면 "이것저것 더 해드릴게"라는 달콤한 말로 수습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대처되고, 사업은 표류한다. 처음의 감동은 결국 커다란 실망으로 바뀐다.

좋은 디자인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기술이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상상은 디자인이 아니라 환상이다. 디자인은 불가능을 약속하는 일이 아니라 가능성을 설계하는 일이다. 그래서 디자이너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능력은 그려내는 손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비로소 본질의 디자인이 시작된다.

서울 동대문의 DDP도 처음에는 그런 질문 앞에 놓여 있었다. 자하 하디드가 제안한 거대한 유선형 건축은 당시만 해도 "과연 지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불러왔다. 많은 사람이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질문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디지털 설계와 정밀제작 공법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며 수만장의 곡면 패널을 하나씩 완성해 갔다. 불가능해 보였던 상상은 결국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었고, 세계인이 찾는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DDP가 우리에게 남긴 가치는 화려한 곡선만이 아니다. 상상은 현실을 무시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끝까지 이해하고 극복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정책결정자의 용기와 기술자의 땀, 수많은 사람의 책임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디자인의 힘은 과장이 아니라 치열한 과정에 있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정말 가능한가. 지속될 수 있는가. 인간을 위한 선택인가. 데리다의 말처럼 사유는 "아니"라고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때로는 그 한마디가 도시를 지키고, 공동체를 살리며, 더 좋은 미래를 만든다. 좋은 디자인은 많은 것을 더하는 일이 아니다. 아닌 것을 걷어내고 본질을 남기는 일이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가장 화려한 약속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한번의 질문이다.

김현선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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