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이 90세야, 친구들 다 세상 떠났다고 여기 와"…세월만 남은 청계천 헌책방 [낮은 곳의 기록자]
[청계천 헌책방과 을지로 인쇄 골목]
활자 대신 영상 보는 시대, 참고서 사던 학생들마저 사라져
인쇄소 골목도 썰렁 "요즘은 연말에 달력도 안만들어" 한숨
[파이낸셜뉴스] "지금은 책을 옛날만큼 안 보잖아요."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천 헌책방 거리. 70대 책방 주인 A씨는 책장 사이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손등에는 작은 밴드가 붙어 있었다. 책을 넘기고 묶고 옮기며 보낸 세월이 손마디에 남아 있었다.
책방 안은 좁았다. 양쪽 벽면에는 책이 천장 가까이까지 꽂혀 있었고, 바닥에도 책더미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검은 비닐봉지와 믹스커피 봉지가 걸려 있었다. 높은 책장 앞에는 나무 사다리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손님이 오래된 전공서나 절판된 책을 찾으면 주인은 그 사다리를 짚고 위쪽 칸을 살핀다고 했다.
A씨는 1975년부터 책 장사를 해왔다고 한다. 경력만 50년이 넘는다. 그는 "2000년대 중반까지는 그래도 장사가 됐다"며 "옛날에는 신학기만 되면 학생들이 책 사러 나왔다. 3월에는 점심도 못 먹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옛날 손님은 주로 학생이었다. 중고등학교 참고서, 대학교재, 전공서가 잘 팔렸다고 한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비싼 새 책을 사기 어려운 학생들이 중고 교재를 찾던 곳이었다. A씨는 "대학생들이 여기 와서 교재를 사 갔다"며 "지금은 그런 사람이 거의 안 나온다"고 털어놨다. 이어 "요즘에는 유튜브나 앱으로 책을 본다"고 덧붙였다.
헌책방 거리 길가에는 헌책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성경과 찬송가, 소설, 인문서, 어학책, 오래된 전집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일부 점포는 책을 문밖까지 내놨고, 일부는 셔터를 내린 채 비어 있었다. 임대를 알리는 한 점포 앞에는 천으로 입구가 가려져 있었다. 오래된 간판 아래에 남은 책방 이름만 이곳이 한때 서점이었음을 말해줬다.
한때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학생과 독서인들이 책을 찾아 몰리던 곳이었다. 이 거리는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인문360 자료에 따르면 1959년부터 헌책방이 하나둘 생기며 형성됐고, 1970년대에는 200여곳이 성업했다. 이후 대형서점과 온라인 중고서점, 독서 인구 감소가 겹치며 2010년대 중반에는 20여곳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가 헌책방 거리를 찾은 지난달 31일 기준 헌책방은 10여곳 정도였다.
책방이 줄어든 배경에는 책을 읽는 사람 자체가 줄어든 현실도 있다. 문체부가 지난 3월 공개한 '2025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연간 종합독서율은 38.5%였다. 종이책 독서율은 28.8%였고, 성인의 연간 종합독서량은 2.4권으로 조사됐다.
책방 주인 A씨가 체감하는 변화도 이 숫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책 읽기 자체를 예전만큼 안 한다"며 "찾는 사람은 철학책이나 인문사회 쪽 책을 물어보는데, 그런 책도 예전처럼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책방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A씨는 90대 단골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그 할아버지도 예전에 여기서 헌책방을 했다. 청계천에 50년 넘게 다닌 분"이라며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 말할 사람이 없다고, 지금도 일주일에 몇 번씩 나온다"고 말했다. 책을 사지 않더라도 책방에 들러 잠시 앉았다 가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청계천에서 멀지 않은 을지로 인쇄골목도 사정은 비슷했다. 같은 날 찾은 이 골목에는 '인쇄', '제본', '코팅', '명함' 간판이 촘촘히 붙어 있었다. 좁은 골목 안쪽에는 낡은 재단기와 종이 박스, 손수레가 놓여 있었다. 문을 연 가게도 있었지만 셔터가 내려간 점포도 적지 않았다.
50대 인쇄업자 B씨는 "명함도 전단도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그는 "요즘은 앱이나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사람이 많다"며 "소량 주문은 들어와도 단가가 낮고, 큰 물량은 줄었다"고 말했다. 이어 "기계를 켜놓고 일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 때가 있다"고 했다.
연말마다 들어오던 달력 주문도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나왔다. 달력 같은 판촉물 주문은 어떤지 묻자 또 다른 인쇄업자 C씨는 "요즘 누가 달력을 보나요? 다 휴대전화로 해결하지"라고 답했다.
을지로·충무로 인쇄골목은 한때 서울 인쇄업의 중심지였다. 서울시 소식지 '서울사랑'에 따르면 이 일대는 과거 서울 인쇄업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고, 인쇄 관련 인력만 2만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명함과 전단, 소책자 주문은 이제 온라인 인쇄 플랫폼을 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책 인쇄 물량도 대형 인쇄 시설로 빠졌다. 골목의 작은 인쇄소들은 빠른 납기와 후가공, 소량 주문으로 버티고 있지만, 상인들은 "예전처럼 한 번에 들어오는 물량이 없다"고 했다.
소상공인 전체로 봐도 폐업 부담은 작지 않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 6월 발표한 폐업 사업자 분석에 따르면 2025년 폐업 사업자는 97만6000개, 폐업률은 8.64%였다. 최근 1년 안에 폐업한 소상공인 1500명을 조사한 결과 폐업 이유로는 '수익성 악화·매출 부진'을 꼽은 응답이 70.9%로 가장 많았다. 폐업 당시 부채가 있었다는 응답은 68.5%였고, 평균 부채 금액은 8531만원이었다.
헌책방과 인쇄소도 손님이 직접 찾아와야 굴러가던 업종이었다. 절판된 책 제목을 말하면 주인이 책장 위아래를 뒤져 찾아줬고, 명함과 전단은 종이 두께와 색을 맞춰가며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온라인 검색과 주문 화면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골목에 남은 가게들은 줄어든 단골과 오래된 재고, 낮아진 단가 사이에서 하루 장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변화는 A씨의 책방 안에서도 그대로 보였다. 책은 여전히 책장마다 빼곡했지만, 책을 찾는 발길은 예전만 못했다. A씨는 책장 위쪽을 한동안 올려다봤다. 사다리 옆에는 오래된 책들이 여전히 빼곡했다. 그는 "요즘처럼 장사 안 된 적은 없었어요. 그래도 시대가 그러면 수긍해야지"라고 말했다.
잠시 말을 멈춘 A씨는 다시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래도 아는 사람들은 온다"며 "여기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찾아온다"고 덧붙였다.
[email protected] 한승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