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視角] '숫자' 말고 '구조'를 바꿔라
정부가 새 가계부채 안정화 방안을 놓고 고심을 거듭 중이다. 현 정부 들어 네 번째 가계대출 규제책이다. 이번 방안은 대출총량 규제 기조(전년 잔액 대비 1.5% 증가)를 지속하면서 비거주 1주택자를 타깃으로 삼고 있다. 칼은 '전세대출 규제'로 관측된다. 현재 2억원인 비거주 1주택자의 전세대출을 전면 금지하는 것이다.
가계부채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만큼 금융 시스템 안정 차원에서 대출 관리의 필요성에 이견은 없다. 문제는 정책의 방향이 아니라 방식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숫자를 맞추기 위한 규제가 아니라 시장의 구조를 바꾸는 정책이다.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정책은 오랫동안 '총량 관리'라는 틀 안에서 움직여 왔다. 은행별 대출 증가율을 제한하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강화하며, 대출 가능액을 줄이는 방식이다. 단기간에 대출 증가세를 억제하는 데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대부분 금융기관의 신규 대출을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왜 가계가 빚을 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총량 규제가 항상 동일한 효과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한정된 대출 한도를 보다 안전하고 수익성이 높은 고객에게 우선 배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신용도가 높고 자산이 많은 차주는 상대적으로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청년층이나 사회초년생, 무주택 실수요자는 같은 규제 아래에서도 훨씬 높은 문턱을 마주하게 된다. 정책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체감하는 부담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가계부채를 줄이겠다는 정책이 오히려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킬 가능성도 적지 않다. 현금 여력이 충분한 계층은 규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반면에 대출이 필요한 계층은 주택 구입이나 자산 형성 기회를 잃는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현금 부자의 협상력이 커진다. 금융시장에서 투자 기회도 자금력이 있는 계층으로 집중된다. 결국 금융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자산 격차를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풍선효과도 우려된다. 은행권 대출이 막히면 자금 수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실제로 과거에도 은행 규제가 강화될 때마다 상호금융이나 저축은행, 보험사, 대부업 등 비은행권으로 대출 수요가 이동하는 현상이 반복됐다. 규제가 강할수록 시장은 우회로를 찾는다. 금융당국이 총량만 관리하고 자금 흐름 전체를 보지 못한다면 가계부채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질 뿐이다.
시장과 정책의 엇박자도 고려해야 한다. 최근 부동산 시장은 지역별로 온도 차가 뚜렷하다. 일부 지역은 거래가 살아나지만 상당수 지방은 여전히 침체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획일적인 대출 규제를 적용하면 안 될 일이다. 과열 지역을 잡기 위해 침체 지역까지 함께 위축시키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가계부채를 방치하자는 건 아니다. 높은 가계부채는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키우고 소비를 위축시키며 장기 성장에도 부담을 준다. 그러나 총량 규제는 어디까지나 응급처치일 뿐이다. 장기적으로는 주택 공급의 안정, 소득 기반 확대, 금융사들의 건전한 여신 관행, 그리고 실수요자를 세밀하게 구분하는 정교한 대출 정책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숫자를 줄이는 정책보다 중요한 것은 위험을 줄이는 정책이다.
가계부채 정책은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목표와 국민의 자산 형성이라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규제는 필요하지만 규제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출 총량이라는 숫자를 맞추는 데만 집중한다면 정책은 성공할지 몰라도 시장은 왜곡될 수 있다. 가계부채 정책이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얼마나 줄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를 보호했고, 누구에게 기회를 남겼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email protected] 최갑천 금융부장·마켓부문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