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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나가사키 그리고 '비키니 데이'에 터진 분노 [전경수의 요지경 日本]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17) 제3의 피폭지
미국의 원폭실험장 된 비키니 섬
1946년부터 12년 간 67회 지속
'히로시마 1000배' 수폭 실험 날
160㎞ 떨어져 있던 참치잡이 배
선원 모두 '죽음의 재' 낙진 노출
최대 판로 도쿄 수산시장도 발칵
"1954년 3월 1일 비극 잊지말자"
일본사회 반핵운동 확산 출발점

도쿄 유메노시마공원 내 전시관을 꽉 채운 '제5복룡환(第五福龍丸)' 실물. 사진=전경수 교수
도쿄 유메노시마공원 내 전시관을 꽉 채운 '제5복룡환(第五福龍丸)' 실물. 사진=전경수 교수

해마다 8월이면, '열도(熱島)'의 폭염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현장에서 더욱 들끓는다. 1945년 8월 6일 08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사실 확인까지 이틀, 최고전쟁지도회의 개최에 하루를 더 소모한 것은 "범죄적 태만"(이오키베 마코토 교수)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9일의 나가사키 원폭투하! 현장에서 기념하는 장소의 한쪽에는 조선인피해자들의 위령비도 보인다. 반전과 반핵의 함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빅브라더를 자처하는 자들이 원폭가방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제스처의 전쟁놀이는 그칠 줄 모른다.

■원폭의 기억,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가해와 피해의 상징이 치환되는 장소인 히로시마에서 올리는 묵념의 의미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히로시마는 청일전쟁 때부터 전쟁지휘소 역할을 한 곳이며, 대동아전쟁 동안에는 육군 제2총군사령부와 해군 항만이 위치했기 때문에, 원폭 투하의 직접적인 표적이 됐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은 군수공장이 밀집해 있었던 코쿠라(小倉)를 표적으로 괌의 공군기지에서 이륙했던 전폭기가 구름 덮인 목표를 찾지 못하고, 바다가 아닌 육지를 찾다가 구름 걷힌 곳에서 원폭을 떨어트린 곳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히로시마의 폭심지는 전쟁과는 거리가 먼 상공회의소 건물, 나가사키의 폭심지는 평화의 상징인 카톨릭 성당이라는 아이러니가 '피해 일본' 담론에 한몫을 한다. 지구상에서 현재까지 원폭이 투하된 곳은 일본 뿐이다. 이처럼 반전반핵 담론의 최선봉에 선 피폭일본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외에 간접적이지만 제3의 피폭지가 있다. 다름 아닌 도쿄의 어시장이다.

인천상륙작전의 한국전쟁 영웅 맥아더 장군은 전쟁 중 해임됐다. 중공군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원폭 사용을 주장했던 맥아더를 유엔군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한(1953년) 트루먼의 결정은 1946년 이후 미국 해군의 마샬군도 비키니 환초의 수폭실험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야 한다. 원폭의 결행과 회피 사이의 미국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입장의 희생물이 맥아더였다.

마샬군도는 1500개의 섬으로 구성됐고, 1999년 9월 17일 마샬군도공화국으로 독립했다. 그중에서도 비키니 환초는 수폭실험지라는 명목으로 201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섬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신탁통치령이었는데, 냉전시대 핵실험 장소로 선택된 사실상의 전략기지였다. 미국은 1946년 7월부터 비키니 환초에서 원폭 실험을 지속했고, 1952년부터는 수소폭탄 실험을 시작해 12년간 총 67회의 핵실험이 있었다. 1958년까지 비키니 환초를 비롯해 에니웩 환초, 롱겔랍 환초, 우티릭 환초에서 지속됐다.

1954년 '캐슬 브라보(Castle Bravo)' 작전명의 수폭 실험은 히로시마 원폭의 1000배가 넘는 위력을 기록해 섬이 사라지고 해양 환경을 치명적으로 오염시켰다. 주민들은 남쪽의 킬리(Kili)로 강제 이주 당했고, 이 역사적 비극을 기리기 위해 매년 3월 1일을 '비키니 데이(Bikini Day)'로 지정해 피해를 되새김한다. 핵실험 해역의 주민들이 '죽음의 재'로 목욕하는 일이 벌어졌다. 섬의 살림살이가 통째로 박살났음은 물론이고, 이 문제의 천착에 집중한 인류학자가 로버트 카이스테(1936~2018)다. 태평양 도서가 그의 연구 무대였고, 1968년부터 비키니 참상과 관련된 문서들을 출판했다. 미네소타대학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출판한 대표적인 저서가 '비키니 사람들: 강제이주 연구'(1974년)다.

미국 해군의 작전으로 수행됐던 수소폭탄 실험 날인 1954년 3월 1일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 제5복룡환(第五福龍丸, 길이 30m 무게 140t)이 핵실험 장소로부터 160㎞ 떨어진 공해상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있었다. '항해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았다. "오전 10시30분 그물 끌어올리는 작업종료 후 북으로 항해하였다. 원자폭실험지라고 생각되는 비키니 환초까지 87해리, 최단거리의 비키니도까지는 75해리의 지점에서 섬광과 음향이 들렸다."

이 섬광으로 인해 비키니 사람들에게는 태양이 두 개 뜬 날이라는 전설이 심어졌다. 선원 23명 전원과 갑판에 떨어진 흰색 가루들을 바닷물로 씻어내면서 북상 항해를 지속했다. 그날 저녁부터 방사능의 영향이라고 생각되는 증상들이 선원들의 몸에서 나타났다. 두통, 구토, 설사, 치하출혈, 그리고 얼굴빛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경과하면서 모발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공포심은 어떠하였을까?

3월 14일 시즈오카현 야이즈(燒津) 항구로 귀항한 제5복룡환의 참치들을 동경의 축지시장(築地市場)에서 판매하기 전, 방사능 검사 결과 피폭이 확인됐다. 포획된 2t의 피폭 참치는 즉시 시장의 공지에 매립했다. 그 즈음에 야이즈항으로 들어왔던 어선들로부터 하선된 모든 생선들의 판로가 어렵게 된 소문 피해도 적지 않았다. 야이즈에서 도쿄의 수산시장까지 참치들을 운반하는 과정에 개입됐던 인원과 교통수단에 대한 파악과 조사로 인해 일대 혼란이 빚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선원들의 병명은 공식적으로 '급성방사능증'으로 공표됐고, 이러한 과정들이 3월 15일부터 자세하게 보도됐다. 미국 해군 당국은 3월 19일에야 비키니 해역의 '위험구역'을 기존의 8배로 확대해 공포했다.

■비키니 핵실험과 제5복룡환의 비극

도쿄도내 강동구에 있는 '유메노시마공원(夢の島公園)' 내의 전시관에 이러한 내용들이 자세하게 진열돼 있으며, 실물 배의 옆으로 관람이 가능하도록 계단을 이용한 전시관을 마련했다. 한쪽에는 피폭 당시의 내용과정을 본국으로 전송했던 선박용 무선전신송신기와 단파수신기 및 관련 부품들도 만져볼 수 있도록 전시돼 있다. 관련 기록은 '제5복룡환은 항해중(第五福龍丸は航海中)'이라는 단행본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 배는 동경수산대학의 실습선으로 개조돼 사용하다가, 1967년에 폐선 처리돼 쓰레기장에 방치되었다가, 도쿄 당국의 원수폭 반대운동 일환의 기념관 건설 결정에 의해 1976년에 전시관으로 이관됐다.

실험장소로 사용됐던 롱겔랍 환초의 주민들은 이주지인 킬리로부터 고향섬으로 귀환 운동을 했고, 미국 당국은 주민들의 소원이라는 명분 하에 3년 뒤인 1957년에 '안전'을 담보로 허가했다. 당시 롱겔랍 환초의 방사능 수치는 허용기준치보다 높았다는 사실의 자료를 확보한 상태에서 "환경중의 방사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중요한 가치를 보여주는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미군 의사의 보고도 제시된 바 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그리고 '비키니 데이'에 터진 분노 [전경수의 요지경 日本]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email protected]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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